[include(틀:명사)] ||<-2>
'''{{{+1 척계광}}}[br]戚繼光'''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척계광.png|width=100%]]}}} || || '''시호''' ||무의(武毅) || || '''이름''' ||척계광(戚繼光) || || '''자''' ||원경(元敬) || || '''호''' ||남당(南塘), 맹제(孟諸) || ||<|2> '''출생''' ||[[1528년]] [[11월 12일]] || ||[[명나라|대명]] [[산동성]] 등주부 [[펑라이구|봉래현]] || ||<|2> '''사망''' ||[[1588년]] [[1월 17일]] (향년 59세) || ||[[명나라|대명]] [[산동성]] 등주부 [[펑라이구|봉래현]] || || '''국적''' ||[[파일:명나라 보.svg|width=22]] [[명나라|대명]] || [목차] [clearfix] == 개요 == [[명나라]] 중기의 장수. 척경통(戚景通, 1473~1544)의 아들로 자는 원경(元敬), 호는 남당(南塘), 맹제(孟諸), 시호는 무의(武毅). 명나라 해안에 자주 침입해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를 토벌한 명장으로 유명하며, 명나라 북방지역의 전력강화에도 크게 공헌했다. == 생애 == [[산둥성]] 등주 출신이다. 척씨 집안은 대대로 등주의 지휘첨사를 하던 가문으로, 아버지 척경통은 50살이 넘은 나이에 늦둥이로 척계광을 낳았다. 척계광은 1549년에 무거시에 합격해 등주의 지휘첨사를 지냈으며, 1553년에는 서도지휘첨사가 되어 북쪽의 [[타타르족]]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훈련을 강화하고 규율을 엄격히 하면서 삼촌이 군율을 어기자 이를 엄격히 적용했으며, 1555년에는 절강도사첨사가 되어 영파, 소흥, 대주 등을 총괄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1556년에 참장으로 승진했으며, 1559년에 금화현, 의오현 등에서 4천 명을 모집해 척가군을 조직했다. [[원앙진]]을 고안하여 [[1561년]] [[왜구]]가 대주에 상륙하자 [[원앙진]]으로 대항해 1달 넘게 싸워서 5천 명 이상을 죽였고, [[1562년]]에는 온주, 대주를 공격하자 2년을 싸운 끝에 격파했으며, 왜구가 남하해서 여러 지역을 노략질하자 추격해 횡서에서 2,600명을 죽이고 진지 60여 곳을 초토화했다. 그래서 척계광은 왜구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그가 개발한 일명 [[절강병법]]은 [[조총]]을 운용하는 포수, [[활]]을 쏘는 사수, [[장창]]과 검으로 조총병을 엄호하는 살수 등 3개 부분 병력이 협력하는 체계였다. 그리고 [[보병]]부대 대부분을 조총 및 총의 선조뻘인 삼안총 등으로 무장시켰고, [[기병]]에도 조총을 도입해 총기병을 만들기도 했다. 나중에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된 명군의 남병 부대들도 다들 절강병법을 도입해 일본군을 격퇴했다. [[1563년]]에는 평해위에서 유현, 유대유 등과 함께 왜구의 주력군을 토벌하고 그 공으로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564년]]에는 [[광둥성]] 지역에서 왜구의 잔당까지 토벌해 왜구의 자취를 감추게 했다. 왜구가 토벌된 후에는 [[1568년]]에 계주로 부임해 [[내몽골]]에 대한 대비로 10년에 걸쳐 만리장성을 건설했고 [[몽골군]]의 침략을 대비했다. 이로 인해 내몽골의 튀메드부의 [[알탄 칸]]이 입조해서 공물을 바치게 되었으며, 척계광은 [[장거정]]에게 중용받았다. 하지만 1582년에 장거정이 죽자 참소를 당해 [[1583년]]에 광동으로 좌천되었다가 파면되고[* 근본적인 이유는 척계광이 장거정에게 중용됐고 그와 가까운 관계였기에, 장거정의 정적들에게서 공격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1588년]]에 등주에서 사망했다. == 결혼과 가정 == 전법과 전투에 능했던 전설적인 장수이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공처가]] 중 한 명이다. 대부분 야사의 기록이라 신빙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좀 의문이지만, 척계광의 공처가 에피소드는 정말 차고 넘친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쥐여살던 척계광이 자신의 엄중한 군영에 아내를 불러 남편의 위세를 보이려 했지만, 불려온 아내가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묻자 "그냥 군대 구경 시켜주려고"라고 답하며 쫄았던 이야기. 그리고 참다 못한 척계광이 하루는 칼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침실에 뛰어들었는데, 역시 아내가 "뭐하는 짓이냐"며 화를 내자 "[[닭]] 잡아 주려고"라고 말을 돌려버렸던 이야기가 있다. "다음부터는 닭 잡을 때 고함지르지 않도록, 시끄러우니까."라는 아내의 핀잔을 들은 것은 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척계광이 [[왜구]]와 싸울 용사를 모집할 때 "아내를 무서워하지 않는 자와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는 각각 다른 깃발에 서도록"이라고 명했다. 바로 직전까지 용맹을 자랑하던 이들이 모두 아내를 무서워하는 쪽에 섰을 때, 딱 한 사람만 무서워하지 않은 쪽에 섰다. 감동한 척계광이 이유를 묻자, 그는 "사실 장군이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음. 그런데 잘 모를 때에는 남들 따라가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마누라가 말했음"이라고 대답하여 척계광을 벙찌게 했다고. 덕분에 중국 미디어에서 척계광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나오는 것이,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아내와 벌벌 떠는 척계광이다. 척계광의 부인은 왕씨로, 무관인 만호(萬戶)[* 명대에는 만호라는 직위가 없었지만 만호라 불리는 기록이 제법 보이는데, [[명나라]]의 군사 조직인 위소제(衛所制)에서 소(所)의 장관이 천호(千戶)였으므로, 위(衛)의 장관인 지휘사(指揮使)의 별칭으로 보인다.] 왕동(王棟)의 딸이고, 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출처1 맹제척공묘지명(孟諸戚公墓志銘), 척계광연보(戚繼光年譜)] 한국에서는 한국어 위키피디아나 기타 몇 군데에서 "척계광의 아내는 [[가정제]]의 [[후궁]]인 회영현비 정씨(懷榮賢妃鄭氏)의 딸 청교공주(淸嬌公主)로, 이름은 주여화(朱如華)"라는 글이 보이지만, 중국어 위키피디아나 중국 웹에서는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가정제의 [[공주]]는 모두 5명으로, 상안공주(常安公主) 주수영(朱壽媖), 사유공주(思柔公主) 주복원(朱福媛), 귀선공주(歸善公主) 주서영(朱瑞嬫)은 시집가기 전에 죽고 2명만이 하가(下嫁)[* 신분이 높은 여자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 황녀의 경우 어떤 남자에게 시집가더라도 '하가'가 될 수밖에 없다.]할 때까지 살아남아, 영안공주(寧安公主) 주녹정(朱祿媜)은 이화(李和)에게, 가선공주(嘉善公主) 주소진(朱素嫃)은 허종성(許從誠)에게 하가했다. 즉 가정제에게는 청교공주라는 딸이 없었다.[*출처2 명사(明史) 공주열전 세종오녀] 아무래도 <영웅지애>라는 척계광이 등장하는 드라마의 정보가 역사적 사실로 잘못 퍼진 듯 보인다. 이처럼 전설적인 공처가인 주제에, 척계광은 [[첩]]을 3명이나 들여 아들을 5명이나 낳았다. 아들들의 이름은 척조국(戚祚國), 안국(安國), 창국(昌國), 보국(報國), 흥국(興國)이다. 이름들을 보면 척계광은 자신의 아들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이름있는 무관으로 성장해 주길 기대한 것 같지만, 척계광의 희망과는 달리 이 아들들은 이후 역사에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출처3 맹제척공묘지명(孟諸戚公墓志銘), 척계광연보(戚繼光年譜)] == 여담 == * 용행검법의 [[개조]]로 알려져 있다. * 저서로는 [[기효신서]], 연병실기, 지지당집 등이 있다. 특히 기효신서가 유명하며, 이 책에 나온 전법이 [[조선]] 중기 군제의 핵심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인지도에 비해서는 영상작품에 등장하는 경우가 적은 편이다. * 척계광이 만들었다는 광병(光餠)은 일종의 [[빵]]으로서, 가운데 구멍을 내고 줄로 줄줄이 묶어 목에 두르거나 허리에 묶어서 운반했다. 즉, [[전투식량]]. *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자세하게 다룬 바가 있다. [[https://youtu.be/qXGrDVfIWmU|참조]] * 척계광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냐면, [[원앙진]] 전법이 없던 1555년 명나라는 '''고작 72명'''의 왜구들을 1명도 죽이지 못하고 900명이 전사하기도 했다.[* 참고로 동시기 [[조선]]은 2차 [[을묘왜변]] 당시 제주도에서 '''70명으로 14배가 넘는 1,000명의 적을 무찌른 엄청난 대첩을 거두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고려]]나 척계광의 [[원앙진]] 전법을 도입한 명나라군조차 14:1이라는 숫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긴 적은 없었다. [[https://www.newsn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60120|출처]]] 이렇듯 이전까지 [[왜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명나라군]]을 [[왜구]]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척계광이다. 척계광이 정비한 군체계로 조직된 남방병의 화력전은 [[센고쿠시대]]의 전란으로 단련된 왜군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더불어 조선군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자세한 내용은 [[기효신서]] 참조. == 창작물에서 == 2017년작 [[중국 영화]] [[풍운대전]][* 원제는 탕구풍운. 영제는 God of war.]에선 척계광의 대주 전투를 다루고 있다. 척계광 역은 조문탁이 맡았는데 전투묘사의 스케일은 그리 크지 않고 조문탁, [[홍금보]][* 유대유 역이지만 초반에 해임되어 중반부터는 미등장.], 쿠라타 야스아키 등의 액션 전문배우들이 나온 것치고는 액션도 화려하진 않지만, [[절강병법]], [[원앙진]]을 포함한 육탄전 묘사는 볼만한 편이다. 덕분에 [[일곱 도시 이야기(소설)|일곱 도시 이야기]]에서도 이게 언급되어 나올 정도. 1990년대 후반에 [[대만]]에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척계광이 주역으로 나온 게임도 나온 걸, 국내 게임 월간지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 사용 가능한 제독 중 한 명으로 나온다. 성우는 [[김영찬(성우)|김영찬]](한국)/[[코바야시 치카히로]](일본) [[분류:1528년 출생]][[분류:1588년 사망]][[분류:옌타이시 출신 인물]][[분류:군인]][[분류:명나라의 인물]][[분류:카게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