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분류:조선의 붕당]] [include(틀:조선의 붕당)] [include(틀:북인)] [목차] == 개요 == 청소북([[淸]][[小]][[北]])은 [[북인]]에서 분당한 [[소북]]에서 다시 분당하여 대표적인 반[[유영경]] 인사인 [[남이공]]을 중심으로 형성된 붕당이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북인]] 계열 중 힘 좀 쓴 붕당.[* 다만 단독으로는 힘을 못 썼고, [[남인]]으로 활동하였다.] 청북(淸北), 남당(南黨)이라고도 한다. == 상세 == [[선조(조선)|선조]] 후반에 [[소북]]은 두 영수인 [[남이공]]과 [[류영경]] 사이 갈등 때문에 청소북과 [[탁소북]]으로 다시 분당되었다. 1608년 [[광해군일기]] 사론에 >"류영경이 나라의 권력을 잡았을 때는, [[김신국]](金藎國)·[[남이공]]이 모주(謀主)가 되더니만, 영경[* 류영경.]이 패한 뒤에는 김신국과 남이공이 맨 먼저 제창하여 창을 거꾸로 잡고 공격하면서 깊이 희분(希奮)[* 류희분.]과 결탁하여 날뛰고 기탄없이 굴었다. 청북(淸北)이니 탁북(濁北)이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 내어 영경과 다르다는 것을 보였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4월 21일) 고 하였으며 1610년의 실록 기사에는, >"당초 류영경의 당(黨)을 소북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소북 중에 또 청북(淸北)과 탁북(濁北)이 있었다. 대개 그 중에서 다소 강직하여 스스로 염치가 있다고 하는 자를 사람들이 청북이라고 칭하고, 그 나머지 무리를 탁북이라 이르니 김대래와 같은 무리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3월 9일) 고 하여, 비록 수장 [[류영경]]은 1608년 사망하였으나 그의 영향력으로 탁북의 형성 이유를 기록하고 있고 反류영경 세력의 형성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실록에는 "[[소북]] 중에는 또 청북과 탁북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임인년(1602년)에 류영경이 정승으로 들어와서 등용한 것은 모두 소북이었다. 정권을 잡은 7년 동안 남이공 등은 다시 기용되지 못하다가 영경이 패하게 되자 이공 일파가 미리 그 기미를 알고 대립하는 형상을 취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공의 무리를 청소북(淸小北)이라 하고 영경의 무리를 탁소북(濁小北)이라 지목하였다." 고 하여, [[남이공]]과 [[류영경]]의 정치적 대립이 [[소북]] 분당, 즉 청소북과 [[탁소북]] 분당의 주요 원인임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실록에는 남이공을 ‘청북의 괴수’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3월 23일). 청소북의 영수이자 광해군의 처남이기도 했던 류희분은 [[대북]]의 [[이이첨]]과 손을 잡고 광해군 초기에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대북이 권력을 독점하자 청소북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가 [[인조반정]] 당시 [[대북]]과 함께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임진왜란]] 이후 남북 분열이 확실시된 이후로는 별 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북인]] 정권 내에서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서인]]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며 조정에서 여러 자리를 차지했지만 [[광해군]] 때 [[대북]]의 날조로 일어난 옥사로 몰락하자 대북의 전횡에 대해서 역시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고 훗날 [[인조반정]]의 조짐이 보이는데도 방관하면서 사실상 그들에게 동조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북]]의 분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중북]]과 함께 [[남인]]에 흡수되었으며, [[중북]]과는 다르게 [[남인]] 내에서 힘을 좀 썼다. 또한 [[광해군]] 초기 [[대북]]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던 탁소북의 송사리 몇몇은 아예 [[서인]] 정권에 참여하며 전향했다. == 주요 인물 == * '''남이공''' * 김시국(金蓍國) * 남이신(南以信) * 박이서(朴彛敍) * 임연(任兗) * 임장(任章) * 류희분 == 둘러보기 == [include(틀:조선의 역대 집권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