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옥의 종류)] [목차] == 개요 == [[짚|볏짚]], 밀짚, [[갈대]] 등으로 지붕을 엮어 만든 [[집]]. [[선사시대]]에 본격적인 집의 형태가 생겨날 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주로 서민들이 짓고 살았던 주택 형태이다. [[조선]]의 가옥중 70~80%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이던 집으로 [[양반]], 평민 가리지 않고 살던 곳이다. [[한자]] 표기가 '초가'([[草]][[家]])이므로 '초가집'은 잘못된 표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집'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겹말|의미상 중복되는 말을 더하여 사용한 것이다.]] == 구조 == [[파일:chogajip.jpg]] == 특징 == [[초가삼간]]이라 하여 방마다 3~4평으로, [[원룸]]과 비슷하다. 보통 주방1, 방2의 구조였고 가난한 백성들은 주방1, 방1의 그 좁아터진 집에서 많은 가족들이 엉겨서 살아야 했다. 대부분 단층으로, 그 이유는 [[한옥]] 문서에도 나오지만, 2층 가옥이 극소수인 이유는 [[시베리아]]의 영향을 받은 추운 [[겨울]]과 온돌바닥의 무거운 무게를 2층 이상에는 설치하기 힘들었던 것, 너무 센 가격 때문이었다.[* [[한국사]] 속의 복층건물은 대부분 [[온돌]]이 활성화되기 이전 고대거나, 2층 이상엔 온돌이 없는 건물이다.] 재료가 재료인만큼 [[동아시아]] 3국의 집들 중 그나마 싼 편에 속한다.[* [[중국]]은 [[벽돌]], [[일본]]은 나무, [[한국]]은 나무+흙.] 혹여나 ㄱ자로 단 한 칸이라도 붙는 순간, 그 집은 꽤 사는 집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초가집을 짓는데도 규제는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원칙대로라면 일반인들은 많아봐야 10칸이 한계였다. 물론 여유가 없는 집안이라면 알아서도 잘 지켜야 했지만, 잘 사는 집에서 이런 규제를 우회해서 눈에 확 띨 정도가 아니라면 무시하곤 해서 딱히 잘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단열이 잘 되어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지만, [[풀#s-1.2|풀]] 특성상 지붕이 수시로 썩기 때문에 6개월에 한 번씩 갈아줘야 했다. 거기에다가 방역도 잘 되지 않던 시절에는 벌레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굼벵이]]류였다. 지붕 이은 지 조금만 오래되어도 천장에서 한 마리씩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 벌레들은 짚을 먹고 자란 깨끗한 곤충으로, 약용이나 식용으로 좋아서 [[간식]]으로 꽤 먹었다고 하며, 가뭄이나 홍수로 작황이 안 좋았다거나 하는 이유로 [[보릿고개]]가 찾아왔을 때 구황식품으로 먹었다고도 한다. 물론 저런 벌레들이야 위험할 것도 없고 먹을 수도 있었다지만, 문제는 [[지네]] 같은 독충들도 떨어진다는 것. 지네 자체가 상기한 대로 잡아먹을 곤충이 많고 따뜻한 썩은 지푸라기에 잘 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VJ특공대]]에서 관광지용 초가집 지붕을 보수하는 일꾼들이 오래된 초가 지붕에서 나오는 이런 벌레 및 애벌레들을 기름에 볶아서 좋아라 먹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그 중 나이가 많은 일꾼은 "어릴 적 초가집 살 때 지붕 고칠 때마다 이런 벌레 나오는 걸 볶아먹는 추억이 흔했는데, 이젠 이런 관광지용이나 와야지 먹을 수 있다"며 아쉬워했다. 워낙 흔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선 초가집 자체가 옛 조선 민중들의 상징처럼 되었다. 다만 [[김수로왕]]이 초가로 집을 지어서 살았다는 기록을 보면[* 실제로 가야 지역에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기와집 문화가 없었다. [[가야]] 항목 참조.]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지배층들도 초가집을 지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와가 지배층들 사이에서 널리 보급되면서 초가집은 서민들의 주거지로 인식이 확 달라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화재에 취약하다는 인식도 강했기 때문에 [[신라]]에서부터 [[고려]], [[조선]] 시대 때 아예 화재 위험을 이유로 도성의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교체하도록 장려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1426년 [[한양 대화재]]로 인해 1,780채나 되는 집이 불에 탔을 때 그 과반수가 초가집이었을 정도로 화재에 상당히 약한 게 흠이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inxu.jpg]] || || [[상나라]] 궁전 || 또한 '''기와가 발명되기 전'''에는 '''왕궁'''조차도 초가집 형태였다. 대표적인 예시가 [[상나라]]의 왕궁으로서, [[중국]]에서 [[기와]]는 그 이후인 [[주나라]] 시기에 발명되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그런 초가집은 아니고, 위 사진처럼 지푸라기를 검정색으로 칠해 기와집처럼 반듯하게 덮어놓았다. [[고조선]] 궁전도 아마 이랬을 것이다. 볏짚을 구하기 어려웠던 일부 지역에서는 볏짚보다 덜 썩는 [[갈대]]와 [[억새]], 혹은 [[띠]]를 사용하기도 했다. 갈대집이든 억새집이든 초가와는 비교가 안 되게 오래 간다. 초가의 경우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지붕을 교체해 줘야 하지만 억새나 갈대의 경우 잘 이으면 40~50년도 간다고 할 정도다. 다만 지붕을 얹을 만큼 대량으로 구하는 게 어려워 재료를 대량으로 구하기 가능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이를 [[샛집]]이라고 하는데, 지리산 지역에서 주로 지어졌으며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회덕마을에 원형이 보존된 샛집이 남아 있다. 갈대는 주로 강가 지역에서 많이 보였다. 참고로 [[갈대]]와 [[억새]]는 고급 공예 원자재들인 만큼 값이 나갔고, 종친 등에게 나눠주던 이권이었다. == 현재 == [[1960년대]]까지도 초가집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유는 당대에는 [[단독주택|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같은 걸 건축하기에 건축비가 많이 들었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인구의 다수가 소작농이었고, [[독립]] 이후로도 [[한국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서, 상당기간 빈국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을 짓고 살만한 사람들이 적었다. 더군다나 초가집은 매우 구하기 쉽던 재료로 만들었던데다가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시절이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상부상조하는 게 보통이었기에 인건비도 별로 들지 않았고, 설사 도시에 살더라도 농촌 문화의 영향이 남아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비가 적게 들었고 초가집은 그냥 판잣집을 짓는 것에 비해서 (여름에는 벌레가 생기고 겨울에는 화재가 날 위험도 있었지만) 단열도 잘 되었다. 그래서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 서양의 문물이 대거 들어와서 서양식 건축이 대세를 이루게 될 때에도 돈이 없던 당시 서민층으로서는 초가집을 짓는 게 집을 마련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물론 당대의 돈 있는 사람들은 기와집이나 서양식 주택을 짓고 살았다. 일본인들은 일본식 주택([[적산가옥]])에서 살았다.], [[1970년대]] 초엽까지는 도심 중심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초가집이 즐비했다. 다만 지붕 갈기 귀찮은 점은 존재했기 때문에 [[1950년대]]~[[1960년대]]에는 페인트 비슷한 화공약품을 뿌리기도 했다. 이걸 뿌리면 1년은 더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러나 [[새마을운동]][* [[새마을노래]] 가사를 봐도 알겠지만 초가집을 없애자는 게 당시 정부의 정책이었다.]의 일환으로 초가집을 가난의 상징이라며 그 많던 초가집들이 대규모로 허물어지거나 지붕을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으로 갈아엎었기 때문에,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농촌에서도 초가집은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행정력이 완전히 미쳤던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 벽촌에서는 [[1990년대]]까지도 초가집이 남아있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단독주택|현대식 농가주택]]으로 재건축되는 과정 등을 거쳐 사라졌다. 현재 [[하회마을]], [[양동마을]], [[낙안읍성]] 같은 일부 보존된 전통마을이나 민속촌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런 곳들은 기관에서 지원금을 받거나 관광산업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 거라고 한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백제문화공원에도 초가집이 있는데, 이 초가집은 [[백제]] 집자리를 재현한 전시관이다. [[파일:은마앞.jpg]] ([[한강의 기적|대한민국 경제의 급성장]]을 상징하는 사진 그 자체가 되었다) 심지어 지금은 [[구룡마을|상상이 전혀 안 되]]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강남구]] [[대치동]]에도 초가집이 존재했는데, 이 사진은 현재의 [[은마아파트]] 뒤, 하이스턴 아파트 자리에서 촬영되었다. 여담으로, [[분당신도시]]의 중앙공원에도 초가집이 1채 보존되어 있다. [[북한]]도 한발 앞서서 [[1960년대]]에 도시지역에 [[아파트]]를, 농어촌 지역에는 [[문화주택]]이라는 현대식 가옥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면서 초가집이 사라졌다. 현대 북한에서 초가집처럼 보이는 가옥들은 대부분 겨울철 단열 목적으로 일반적인 문화주택의 지붕을 볏짚 등으로 덮은 것이며, 전통적인 초가집이 아니다. 그래도 [[황해도]] 지역에는 초가집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김일성]]이 일부러 [[황해도]] 지역을 남한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개발]]을 잘 안해주었다. [[개성시]]는 상징성이 있어서 개발을 해주기는 했지만. 사실 남한도 [[경기도]] [[고양시]], [[파주시]], [[김포시]]가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군(행정구역)/대한민국|군]]이었던 것처럼 전방지역 개발은 꺼렸다.]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는 [[조선족]]들이 이주한 이래로 초가집을 지어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1970~80년대 이후로는 남한이나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기와집이나 벽돌 콘크리트 집으로 교체되었다. == 해외에서 == [[일본]]에서는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1950년대까지는 초가집([[고민가|갓쇼즈쿠리]])이 상당히 흔하게 존재했지만, 1950~60년대에 출산율 저하와 이촌현상으로 농촌공동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일손이 달리게 되고 [[삼나무]] 가격도 상승하는 바람에 현대식 주택으로 대부분 교체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시라카와고]] 마을이 대표적인 일본의 초가지붕 마을. [[파일:external/www.flissenkamp.nl/p1a3.jpg]]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도 생각보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쪽은 [[팀버프레임]]이나 벽돌집에 갈대지붕을 올려놓은 형태가 많다. == 기타 == == 관련 문서 == * [[짚]] * [[갈대]] * [[기와집]] * [[처마]] [[분류: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