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초 군주)] |||||| '''{{{#ece5b6 초(楚)나라 7대 왕[br]{{{+1 공왕}}}[br] 共王}}}''' || |||| '''[[성씨|{{{#ece5b6 성}}}]]''' ||미(羋) || |||| '''[[본관|{{{#ece5b6 씨}}}]]''' ||웅(熊) || |||| '''[[휘|{{{#ece5b6 휘}}}]]''' ||심(審) || |||| '''{{{#ece5b6 아버지}}}''' ||[[초장왕]](楚莊王) 웅려(熊侶), 웅여(熊旅) || || '''{{{#ece5b6 생몰 기간}}}''' ||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60년 || || '''{{{#ece5b6 재위 기간}}}''' || 음력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60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의 23대 군주, 7대 [[왕]]. [[춘추오패]]로 이름이 높은 [[초장왕]]의 아들이며 [[초강왕]], [[초영왕]], [[자오]], [[초평왕]]의 아버지이다. [[시호]]는 달리 '공'(恭) 또는 '공'(龔)이라고도 한다.[* 恭(공손할 공)과 龔(공손할 공) 두 글자 모두 뜻과 음이 공손할 공으로 같다.] 본명은 웅심. 초 공왕 재위기에 초나라의 패권에 타격을 입힌 [[언릉 전투]]가 일어났다. == 생애 == 초 장왕 23년([[기원전]] 591년), 장왕이 승하하고, 웅심이 초나라 왕이 되었는데, 그는 아직 어렸으므로 [[공자 영제|영윤 자중]]이 섭정했다. 초 공왕 6년(기원전 585년), 자의의 난이 일어났다. 그 일로 대부 석공이 [[진(희성)|진(晉)나라]]로 달아났고 '초재진용'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그리고 당시에 진(晉)나라의 [[군주]]인 [[진경공|경공]]이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무신(巫臣)이라는 자를 [[오(춘추시대)|오나라]]에 보내 국력을 키워 초나라를 견제하려 한 때도 바로 이 때였다.[* 그리하여 오나라는 [[합려]]와 [[부차]] 대에 국력이 절정에 이른다. ] 초 공왕 14년(기원전 577년), [[정나라]]와 허나라를 쳐서 그곳을 복속시켰다. 초 공왕 16년(기원전 575년), 언릉에서 진(晉)나라 [[진여공|여공]]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초 공왕은 이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애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공자 무는 포로가 되었으며, 군사인 자반은 초 공왕과의 작전 회의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 자결하였다. 초 공왕 31년(기원전 560년), 공왕이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는 언릉 전투에서 대패한 것을 자기 책임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악시를 쓰라고 유언했다.[* 악시의 예를 들자면, [[암군]]에게나 주는 시호인 '영'(靈), [[폭군]]에게 주는 시호인 '여'(厲), [[개노답 삼형제|개노답 폭군]]에게 주는 시호인 '양'(煬)이 있다. 추나 걸도 있지만 추는 받은 군주가 없고 걸은 걸왕과 유송의 후폐제 외엔 받은 이가 없다.] 그러나 대부들끼리 의논한 끝에 영윤 자양은 '공'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래서 초 공왕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는 아들인 웅소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초강왕]]이다. [각주] [[분류:초나라의 군주]] [[분류:기원전 56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