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백마문정공(白馬文貞公)[br]{{{+1 崔宏 | 최굉}}}''' || || '''시호''' ||문정(文貞) || || '''작호''' ||백마공(白馬公) || || '''성''' ||최(崔) || || '''이름''' ||굉(宏) || || '''자''' ||현백(玄伯) || || '''생몰''' ||? ~ 418년 || || '''부친''' ||최잠(崔潛) || || '''조부''' ||최열(崔悅) || || '''출신''' ||청하군(淸河郡) 동무성현(東武城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위]]의 중신으로 자는 현백(玄伯). [[최호(북위)|최호]]의 조부로 [[위서(역사책)|위서]]에서는 [[효문제]] 원굉을 피휘하여 최현백으로 나온다. 청하군(淸河郡) 동무성현(東武城縣) 출신. == 생애 == 명문가 청하 최씨 출신으로,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삼국시대)|조위]]의 사공이었던 [[최림(삼국지)|최림]]의 후손이었다. 할아버지 최열(崔悅)은 [[후조]]에서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를 지냈고, 아버지 최잠(崔潛)은 [[전연]]에서 황문시랑(黃門侍郞)을 지냈다. 최굉은 어린 시절에 뛰어난 재능을 지녀서 기주(冀州)의 신동으로 칭송받았다.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에서 부융(苻融)이 기주목으로 부임할 때 최굉에게 겸허한 태도를 보이며 존중하여 최굉은 부융의 밑에서 시랑(侍郞)이 되고 기주종사를 겸임하며 정동부 기실(記室)을 맡았다. 최굉은 일상적인 업무를 총람하다가 빈우(賓友)가 되어서 각종 사무를 막힘 없이 처리했다. [[부견]]이 기이하게 여겨서 최굉을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임명했지만, 최굉은 모친의 병을 이유로 거절하여 저작좌랑(著作佐郞)으로 좌천되었다. [[부비(전진)|부비]]가 기주목으로 부임한 뒤 공조(功曹)를 맡았다. 이때 학헌(郝軒)이 사람을 볼 줄 아는 식견이 있었는데, 최굉에 대해서 근대 이래로 없었던 [[왕좌지재]]라고 칭송하였다. 부견이 패망한 뒤 최굉은 난리를 피하던 도중 적쇠와 [[동진]]의 장수 장원(張願)에게 사로잡혔다. 이때 학헌은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굉이 이런 시기를 만나고도 우쭐대지 않고 제비나 참새와 함께 오르내리니 어찌 아깝지 않은가! 이후 [[후연]]의 모용수가 이부랑(吏部郞), 상서좌승(尙書左丞), 고양내사(高陽內史)로 등용하였다. 최굉은 역임한 관직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난세 속에도 오히려 학문에만 열중하고 재산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처자들이 굶주림을 면치 못했다. 탁발규가 후연의 [[모용보]]를 정벌하고자 상산(常山)으로 행군할 때 최현백을 군을 버리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탁발규는 최굉의 명성에 대해서 듣고 기병을 파견했고, 탁발규가 파견한 기병이 최굉을 사로잡아 군문으로 보냈다. 탁발규는 최굉과 대화를 나누다가 기뻐하여 최굉을 황문시랑으로 삼았으며, 최굉은 장곤과 함께 국가의 중대사를 맡으며 여러 법령과 제도를 만들었다. 한편 동진에서 사신을 파견한 뒤 탁발규도 사신을 보내 동진에 답방하려고 했는데, 대신들에게 국호에 대해 논의하도록 명했다. 이때 최굉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황오제]]가 국호를 정할 때 어떨 때는 태어난 땅에서 국호를 정하거나 어떨 때는 봉국의 이름에서 국호를 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虞), 하(夏), 상(商), 주(周)는 처음에 모두 제후였다가 성덕이 이미 높아지고 만국이 그들을 추대한 뒤 국호도 본래의 호를 따르고 다시 바꾸지 않았습니다. 상나라가 여러 차례 옮겨 다녀서徙 국호를 은(殷)으로 고쳤지만 오히려 겸용하면서 처음의 국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경에서는 '은나라의 군사들'이라고 일렀고 또한 '하늘이 제비에게 명하여 제비가 내려와 상나라를 낳았고 광대한 은토(殷土)에 살았다'고 일렀으니 이것이 그 정의입니다. 옛날 [[한나라]]의 [[고제(전한)|고조]]는 한왕(漢王)의 신분으로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서초(초한쟁패기)|서초]]를 멸했기 때문에 마침내 한(漢)을 국호로 했습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북쪽의 광활한 땅을 다스리고 있지만 폐하의 대에 이르면 국운이 용처럼 비상할 것입니다. 비록 역사가 오래된 나라지만 새롭게 천명을 받았기 때문에 등국(登國) 연간 초엽에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고쳤습니다. 또한 [[모용영]]도 위군을 삼가 바쳤습니다. 무릇 '위(魏)'란 대국의 이름이자 신주(神州)의 상국(上國)이니, 이것은 혁명의 징험으로 이미 상서로운 징조로 나타났습니다. 신은 응당 국호를 위(魏)로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최굉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398년 정식으로 국호가 위(魏)로 정해졌다. 탁발규가 [[업성]]으로 행차할 때 최굉에게 옛일에 대해 물었는데, 최공은 물이 흐르듯이 대답하여 탁발규가 최굉을 칭찬하였다. 이후 탁발규가 수도로 돌아갈 때 항령(恒嶺)에 잠깐 들렀는데, 탁발규가 정상에 직접 올라 귀순한 백성들을 달래다가 최굉이 노모를 데리고 오르는 모습을 보고 최굉을 칭찬하여 소와 곡식을 상으로 내렸다. 탁발규는 또한 이주한 이들 중 직접 가기 곤란한 이들에게 수레와 소를 하사하였다. 최굉은 이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임명되었으며, 관작, 의례, 음악, 율령, 금령의 제정을 총괄하였다. 또한 팔부대부(八部大夫)를 두어 최굉은 36조의 관원들의 임명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는 상서령과 상서복야가 하는 업무와 같았다. 최굉은 탁발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그 권력이 조정을 좌우할 정도였지만 검소하게 생활했고 재산도 없었으며, 외출을 하고 돌아올 때는 수레에 오르지 않고 걸어서 외출했다. 또한 칠순의 노모를 부양할 때도 화려한 음식을 대접하지 않았는데, 탁발규는 더욱 최굉을 존경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어떤 사람들이 최굉에 대해서 너무 검소하게 생활한다고 비난해도 최현백은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409년, 청하왕(淸河王) [[탁발소]]는 탁발규를 시해한 뒤 인심이 불안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대량의 비단을 조정 대신들에게 하사하여 그들을 회유하려고 했다. 최굉은 탁발사가 내린 비단을 홀로 받지 않았다. 이후 태자 탁발사가 탁발소를 죽이고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명원제]]였다. 명원제는 탁발사의 비단을 받지 않은 최굉을 칭찬하여 특별히 비단 200필을 최굉에게 하사하였으며, 탁발사의 비단을 받은 대신들은 이로 인해 수치심을 느꼈다. 최굉은 이후 의도공(宜都公) 목관(穆觀)과 함께 각 지방을 순시하여 부정을 저지르는 관원들을 탄핵했고 명원제는 최굉의 공평한 성격을 칭찬하였다. 412년, 최굉은 장손숭, 혜발(嵇拔)과 함께 조당에서 옥사를 판결하였다. 418년, 최굉의 병이 위독해지자, 명원제는 시중(侍中) 의도공 목관에게 최굉의 유언을 받아오라고 명했으며, 측근들에게는 최굉의 문안을 명하여 하룻밤 사이에 여러 명이 최굉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최굉이 죽자 명원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사공(司空)으로 추증하고 문정공(文貞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상례에 관한 제도는 안성왕(安城王) 숙손준의 고사에 따르게 했으며, 신하들과 속국의 수령들에게 최굉의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명했다. 효문제 태화(太和) 연간에 종묘에 배향되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418년 사망]][[분류:청하 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