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3> '''6대 [[천주교 대구대교구|{{{#000000 천주교 대구대교구}}}]]장'''[br] '''{{{+1 최덕홍 [[사도 요한|{{{#000000 사도 요한}}}]]}}}'''[br] '''崔德弘''' | '''John Choi Deok-hong''' || ||<-3> [[파일:최덕홍_주교.jpg|width=100%]] || ||<|2> '''출생''' ||<-2>[[1902년]] [[6월 2일]] || ||<-2>[[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군]] 서중면 내비동[br](現 [[대구광역시]] [[서구(대구광역시)|서구]] [[비산동(대구)|비산동]]) || ||<|2> '''사망''' ||<-2>[[1953년]] [[12월 14일]] (향년 51세) || ||<-2>[[경상북도]] [[대구시]] [[남구(대구광역시)|남부출장소]] [[남산동(대구)|남산동]][br](現 [[대구광역시]] [[중구(대구광역시)|중구]] [[남산동(대구)|남산동]]) || || '''국적''' ||<-2>[[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28]] || || '''주교 임명일''' ||<-2>[[1948년]] [[12월]] 대목구장 임명 || || '''재임기간''' ||[[천주교 대구대교구|대구대목구장]] ||[[1949년]] [[1월 30일]] ~ [[1954년]] [[12월 14일]]|| ||<-3> [[파일:external/www.cbck.or.kr/19_1.jpg|width=100%]] || ||<-3> '''{{{#000000 CARITAS ET OMNIA}}}''' [br] ('''사랑은 만능이다''')[* 방패형 중앙의 횃불은 사랑의 상징이고, 횃불의 손잡이를 감고 있는 세 매듭은 신·망·애 삼덕을 표시하며, 그 아래의 월계수(月桂樹)와 종려수(琮櫚樹) 2가지는 [[야훼|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유물사관에 대한 [[가톨릭]]의 승리를 상징한다. 사랑의 횃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있는 2개의 백합모상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주보이며, 대구교구의 주보 [[성모 마리아]]의 표시이다. 그리고 문장의 바탕을 푸른색으로 칠한 것은 온 세계를 의미한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 가톨릭]]의 제6대 [[대구대교구|대구교구]]장. 세례명은 '[[사도 요한]]'이다. == 생애 == 1902년 6월 2일 [[경북]] [[대구시|대구]]에서 출생. 1914년 10월 [[대구가톨릭대학교#-s-4.4.3|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 수업을 받은 후, 1926년 5월 29일 졸업과 함께 [[성품성사|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제주 서홍리(西洪里)[*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홍동]본당 주임신부, 1929년 6월부터 1936년 7월까지 제주본당 주임신부, 1936년 7월부터 1940년까지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수,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 [[용산예수성심신학교]] 교수,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전주교구]] 경리부장, 1944년부터 1948년 12월까지 목포(木浦) 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다. 1948년 12월 대구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1월 30일 주교로 성성(成聖)된 뒤 해성병원, 효성여자대학[* 現 [[대구가톨릭대학교]].] 등을 설립, 대구교구의 교육 · 사회복지사업을 주도하는 한편 현재의 왜관대리구에 속해 있는 왜관 · 낙산(洛山) · 성주(星州) 지역의 관할권을 성 [[베네딕토회]]에 위임하고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 하는 경남대리구([[천주교 부산교구]]의 모체)를 설정하였다.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최덕홍 주교의 착좌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서울교구장인 [[노기남]] 바오로 주교가 대구교구장을 겸임한 점을 고려하면, 최 주교가 실질적으로 대구교구장을 맡은 [[한국인]] 최초의 주교가 되는 것이다. 또 서울에서 교육을 받은 이전 교구장들과 달리, 최 주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 1회 입학자로 대구에서 교육받은 교구장으로 지역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추진 방향도 잘 잡을 수 있었다. [[6.25 전쟁]] 때 대구교구는 당시 6개 교구 가운데 유일하게 [[북한군]]에 점령당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최 주교는 [[한국 천주교]]의 중심을 잡았다는 평을 받는다. 신부들이 [[군종 신부]]로 활동하도록 뒷받침해줬고, [[함경남도]] 덕원에서 피신 온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자리 잡게 했다. 당시 최 주교의 비서 신부는 훗날 [[천주교 서울대교구]]장과 추기경이 되는 [[김수환]] 스테파노 신부였다.[* 두 사람은 김수환이 어린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러나 최 주교가 암으로 불과 50대의 나이로 선종하면서, 김수환의 비서 신부 생활은 불과 1년만에 끝났다. 김 추기경은 최 주교를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회고하며 존경심을 표했다.] 1953년 주교회의 [[군종 신부]]단 지도주교를 역임하고 이듬해 11월 암(癌)으로 해성병원에 입원 중, 12월 14일 선종, 대구교구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신부활동 초기 시절 최덕홍 주교의 비서신부로 일한 경력이 있다. [[분류:천주교 대구대교구장]][[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902년 출생]][[분류:195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