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99년 사망]][[분류:청하 최씨]]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1 崔逞[br]최영}}}''' || || '''성''' ||최(崔) || || '''이름''' ||영(逞) || || '''자''' ||숙조(叔祖) || || '''출신''' ||청하군(淸河郡) 동무성현(東武城縣) || || '''생몰''' ||? ~ 399년 || || '''국적''' ||[[전연]](前燕) →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前秦) → [[후연]](後燕) → [[북위]](北魏) || || '''부친''' ||최유(崔瑜)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호십육국시대]] [[전연]],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 [[후연]], [[북위]]의 인물로 자는 숙조(叔祖)이다. == 생애 == 청하군(淸河郡) 동무성현(東武城縣) 출신으로 [[최염]]의 후손이다. 최영의 증조할아버지인 최량(崔諒)은 [[서진]]에서 중서령(中書令)을 지냈고, 할아버지인 최우(崔遇)는 [[후조]]의 [[석호(후조)|석호]]를 섬겨 특진(特進)이 되었고, 아버지인 최유(崔瑜)는 황문랑(黃門郞)으로 임명되었다. [[전연]]에서 [[모용위]]가 재위할 때 군에서 상계연(上計掾)으로 천거되었고 저작랑(著作郞)으로 보임되었으며, 연기(燕記)를 편찬하였다. 370년, 전연이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에 멸망한 뒤 제군(齊郡) 태수로 임명되었다.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전한 뒤 [[동진]]의 [[효무제(동진)|효무제]]에 의해 청하평원2군(淸河平原二郡) 태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적료(翟遼)에게 사로잡혀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되었다가 [[후연]]의 [[모용수]]가 적료를 토벌한 뒤 비서감(秘書監)으로 임명되었다. 397년, [[모용보]]가 [[북위]]의 [[도무제]]와의 전투에서 패전하여 화룡(和龍)으로 달아난 뒤 최영은 이부상서로 임명되었다. [[모용린]]이 즉위하자, 처자를 데리고 도무제에게 귀순했다. 장곤(張袞)은 이전에 도무제에게 최영에 대해 매우 칭찬했기에 도무제는 최영을 만난 뒤 매우 후대하였다. 최영은 상서(尙書)로 임명되고 도무제로부터 정사를 위임받았으며, 36조를 거느렸고 별도로 관속을 받으며 문하성에 거처했다. 뒤에 어사중승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북위에서 후연의 중산을 공격했음에도 함락시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위군은 식량이 떨어졌고 많은 백성들이 곡식을 숨기자, 도무제는 신하들을 소집하여 식량을 조달할 방책을 물었다. 이때 최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디를 따면 식량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옛날 부엉이는 퍼덕거리다가 오디를 먹고 소리를 바꾸었는데, 시경(詩經)에서 이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도무제는 최영의 오만함을 원망했지만 일단 식량을 조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결국 오디를 따서 식량을 충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최영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영: 군인들에게 제때 오디를 스스로 딸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계절이 지나면 오디가 모두 떨어집니다. >도무제: 역적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병사들이 어찌 병갑을 풀고 임야로 들어가 오디를 딸 수 있겠는가? 이게 무슨 말인가! 도무제는 최영의 말에 분노했지만 아직 중산을 함락시키지 못했기에 최영을 처벌하지 않았다. 398년,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의 [[요흥]]이 [[동진]]의 양성(襄陽)을 침공하자, 양성의 수장 치회(郗恢)가 상산왕(常山王) 탁발준(拓跋遵)에게 군대를 요청했고 탁발준은 이를 도무제에게 알렸다. 도무제는 최영과 장곤에게 탁발준을 대신하여 치회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게 했다. 치회가 탁발준에게 보낸 서신에는 ‘현명한 형님께서 중원을 씩씩하게 활보하십니다.’고 언급했는데, 도무제는 치회의 글이 군신의 예를 벗어난다고 여겨 최영과 장곤에게 동진의 황제를 깎아내리는 서신을 쓰도록 명했다. 그런데 최영과 장곤이 서신을 쓸 때 동진의 황제에 대해 귀주(貴主)라는 경칭을 사용했고 여기에 분노한 도무제는 결국 최영을 사사시켰다. 이후 동진에서 [[사마휴지]] 등이 [[환현]]으로 인해 북쪽으로 망명하려고 할 때 사마휴지 일파는 진류 남쪽에서 두 패로 나뉘었는데, 한 패는 후진으로 망명했고 다른 한 패는 [[남연]]으로 망명했다. 도무제는 처음에 사마휴지 등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지만 뒤에 그들이 오지 않은 것을 의심하여 연주 자사에게 사방을 탐문하게 하다가 사마휴지를 수행하던 사람들을 찾았는데,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나라의 위엄과 명성이 먼 곳까지 퍼졌기에 사마휴지 등이 모두 귀순하려고 했지만 최영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연나라와 진나라로 달아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도무제는 최영을 처형한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최영은 슬하에 7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장남과 차남은 요절했고 3남 최의(崔義), 4남 최인(崔諲), 5남 최의(崔禕), 6남 최엄(崔嚴), 7남 최색(崔賾)이 있었다. 최영의 아내인 장씨(張氏)와 4명의 아들들은 기주(冀州)에 머물렀다가 [[남연]]의 [[모용덕]]에게 귀순했다. 유일하게 최색이 최영과 함께 평성에 있었는데 최영이 죽은 뒤에 도무제로부터 책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