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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60C30 20%, #003478)" {{{#FFFFFF ''' 최은희의 주요 수상 이력 ''' }}} }}} |||| ||<#ffffff,#191919><-1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2> '''{{{+1 [[문화훈장|{{{#EDE4D3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2> [[파일:문화보관.jpg|width=170]] || || '''연도''' || '''2014년''' || || '''이름''' || '''최은희''' || || '''분야''' || '''배우''' || ||<-2> '''[[틀:보관문화훈장|{{{#EDE4D3 보관문화훈장(3등급)}}}]]''' ||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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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munhwa.com/2011061701033630136005_b.jpg|width=100%]]}}} || || '''본명''' ||최경순(崔慶順) || ||<|2> '''출생''' ||[[1926년]] [[11월 20일]] || ||[[경기도]] [[광주시]] || ||<|2> '''사망''' ||[[2018년]] [[4월 16일]] (향년 91세) || ||[[서울특별시]] [[강서구(서울특별시)|강서구]] [[화곡동]] || || '''가족''' ||[[배우자]] [[신상옥]], 자녀 1남 1녀[* 둘 다 남편 신상옥家 친척조카를 [[입양]]했다. 아들 신정균 씨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출연하면서 어머니의 실종사건 당시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하였다.] || || '''종교''' ||[[가톨릭]] ([[세례명]] : 소화 데레사) || || '''데뷔'''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반도의 [[여배우]]이자 [[영화감독]]. 1947년 데뷔하여 활동한 배우다. == 활동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ile.koreafilm.or.kr/tn_DSHT047850.jpg|width=100%]]}}} || 1943년 극단 <아랑>의 연구생이 된 후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영화계에 데뷔, 연기력과 미모로 주목받는 신예로 떠오른다. 이 때 촬영기사 김학성과 만나서 동거했다.[* 김학성은 최은희가 언니처럼 잘 따르던 선배 김연실의 남동생이었다.두 사람의 나이차이는 열 살 이상이 났고, 김학성에게는 전부인 소생의 자녀도 있었다. 다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결별. 이 때 최은희는 서울에 있다가 [[심영(배우)|심영]]과 [[황철]]에게 '''1차로 납치된다.'''[* 전쟁 발발 직전에 지방에서 영화 촬영 중이었는데,서울에 있던 남편과 친정 식구들이 걱정되어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고 한다.] 하지만 [[청천강]] 인근에서 탈출했는데, 이 때 '[[북한군]]에게 [[윤간]]당했다.'라는 괴소문이 돌게 된다. 문제는 이후 국군을 따라 위문공연을 하고 다녔는데, 이 과정에서 진짜로 [[한국군]]에 의해서 [[성폭행]] 당했다는 것이다. 윤간은 아니지만 머리에 총을 겨누고 성폭행했다니 빼도박도 못한다. 이는 최은희 본인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신상옥]]을 만났고,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를 계기로 신상옥 감독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김학성은 둘을 [[간통죄]]로 고소했으나, 법적으로 김학성과 최은희는 [[사실혼]] 관계였지 혼인신고는 하지 않은 동거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죄 판결이 나온다. 다만 지금 세대들 중에는 저때 무죄 판결이 나온 사실은 모르고, 간통죄를 지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최은희와 신상옥이 불륜을 저질렀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걸 알 수 있다(...). 자서전을 보면 당시 최은희는 김학성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결혼 생활중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입양]]을 하였다.[* 신상옥의 친척 조카 둘을 입양했다고 한다.] 신상옥은 이후 자녀를 보았기 때문에, 최은희가 [[불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50~60년대 영화계를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나눌 정도로 스타가 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후배 김지미와 경쟁했는데, 흥미롭게도 '[[춘향전]]'을 비슷한 시기에 김지미(홍성기 감독)와 최은희(신상옥 감독)가 각자 버전으로 찍고 동시 개봉하면서 라이벌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과는 신상옥&최은희 페어의 승리로 끝났다.] 이 시절 그녀는 정말 다양한 연기를 선보였는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전통적 여인상에서 <지옥화>처럼 서구적인 글래머상까지 소화하면서 그녀는 초창기 한국영화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1965년에는 [[대한민국]]의 3번째 여성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며 총 3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이 때에 연출한 영화가 본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민며느리>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페미니즘]] 어젠다와 텍스트를 보여준 시대를 앞서간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민며느리>는 제20회 국제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그 이후 신상옥 감독이 중간에 배우 [[오수미]][* 본명은 윤영희로 [[윤영실 실종 사건|나중에 실종되는]] 윤영실의 언니다. 오수미 본인도 1992년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와 사귀게 되면서 [[이혼]]하였다. 1967년부터는 신상옥이 이사장으로 있던 학교였던 [[안양예술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며 후진양성에 주력했지만 1978년 1월 14일에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납북되었으며 동년 7월 19일에 신상옥 감독 역시 홍콩에서 납북되었다]]. 그 후 북한에서도 영화 활동을 이어 나가면서 1985년에는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1986년 3월 13일, [[신상옥]]과 함께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에 있던 도중,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해 10년 넘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1999년에 영구 귀국했다. [[마릴린 먼로]]가 주한미군 위문 공연으로 내한했을 당시, 같이 동행했으며 사진도 남아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동갑이다. == 사망 == 2018년 4월 16일에 향년 91세로 사망했다. 사망 전 1년 동안은 계속 투병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뒤늦게야 전해졌다. 슬하에 친자녀는 없지만 입양한 자녀 2명(1남 1녀)이 있다. == 여담 == 당시 기준으로 꽤 동안이었는데, '''35세에 춘향''' 역할을, '''38세에 여고생''' 역할을 맡은적도 있고, '''43세에 21세 여대생''' 역으로 나온 적도 있다. 40대 초반까지도 주연급 배우로서 군림한 것이다.[* 이렇게 본인의 나이보다 훨씬 어린 배역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 일부에서는 신상옥 감독이 출연료를 아끼려고 나이든 마누라를 부려먹는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후세대의 속칭 [[트로이카]] 여배우들 중에 [[윤정희]]와 [[이미숙]]을 제외하면 모두 30대 초중반 이전에 은퇴하거나 조연급으로 내려간 걸 고려하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동갑내기 탑여배우였던 [[주증녀]]가 주로 어머니 역할로 출연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로맨스 빠빠]]에서는 그녀의 '''딸'''로 분하기도 했다. [[분류:한국 여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연극 배우]][[분류:납북자]][[분류:1926년 출생]][[분류:1947년 데뷔]][[분류:2018년 사망]][[분류:광주시 출신 인물]][[분류:보관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