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 '''{{{#000000 역대}}}''' [[대종상|[[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width=120]]]]}}} || ||<-5> [[파일:daejongawards.png|width=50]] || ||<-5> {{{#000000 '''감독상'''}}} || || 제15회[br]([[1976년]]) || {{{+1 →}}} || '''제16회[br]([[1977년]])''' || {{{+1 →}}} || 제17회[br]([[1978년]]) || || [[설태호]][br]([[원산공작]]) || {{{+1 →}}} || '''최인현[br]([[집념(영화)|집념]])''' || {{{+1 →}}} || [[임권택]][br]([[족보(영화)|족보]]) || ||<-5>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최인현.jpg|width=100%]]}}} || || '''성명''' ||최인현(崔寅炫)|| || '''출생''' ||[[1928년]] [[10월 24일]]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 || '''사망''' ||[[1990년]] [[11월 9일]] (향년 62세)|| || '''학력''' ||[[경상국립대학교|진주농과대학]]|| || '''경력''' ||경남 대곡중학교 교사[br]대종필름 부사장[br]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br]은성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 '''감독 데뷔''' ||《눈물어린 발자국》(1962)||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으로, 사극 영화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 상세 == 1928년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 출신으로 [[경상국립대학교|진주농과대학]]을 나와 교편을 잡고 있다가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1957)|아리랑]]》에 조연출로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고 《눈물어린 발자국》(1962)으로 입봉했다. 최초의 한국·홍콩 합작영화인 《달기》(1964)로 명성을 얻기 시작해 《태조 이성계》 《풍운삼국지》 《태조 왕건》 《이조 상노비사》 《세종대왕》 등 굵직한 작품을 남겼고, 60여편의 연출작 중 사극만 30여편에 달한다. 본인 스스로 대표작은 [[이상(작가)|이상]]의 소설 〈[[날개(소설)|날개]]〉를 원작으로 하는 《이상의 날개》와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집념(영화)|집념]]》을 꼽은 바 있다. 특히 《집념》은 [[대종상]] 감독상을 포함 5개 부문, [[백상예술대상]] 대상과 작품상을 포함 4개 부문을 석권하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신필름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초부터 영화제작 허가가 취소된 1975년까지 [[신상옥]] 사단의 일원으로 신상옥 감독과 콤비로 활약했다. 궁중의 복잡미묘한 예의범절, 의상, 소품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하며 특히 수 천명이 동원되는 군중씬에 일가견을 지녔다. 1990년 마지막 연출작인 《친구야! 친구야!》가 개봉한지 두어달 만에 타계했다. [[파일:attachment/cancan.jpg]] 특이하게 1981년 일본 만화 [[캔디캔디]]의 실사 버전인 《캔디 캔디》를 만들었다. 당시 영화계가 흥행이 어렵던 시기였는데 마침 MBC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캔디가 큰 인기를 끌자 이러한 불황을 어린이 영화로 타개해 보려고 직접 판권을 사다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나중에 탤런트로 활약하면서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신인연기상을 받은 [[최선아]]가 최효선이란 본명으로 출연했다. [[분류:1928년 출생]][[분류:1990년 사망]][[분류:진주시 출신 인물]][[분류:한국 영화 감독]][[분류:경상국립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