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최준}}}'''[br]'''崔浚[* [[http://db.history.go.kr/id/haf_086_0090|1919년 5월 일본 외무성 기록 騷蜜 제2219호]]에는 崔'''{{{+1 俊}}}'''으로 기재되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최준2.jpg|width=100%]]}}} || || '''초명''' ||최영조(崔泳祚)[* [[승정원일기]]에는 崔'''{{{+1 永}}}'''祚로 표기하기도 했다.] || || '''자''' ||내윤(乃允) || || '''호''' ||문파(文坡, 汶坡) || || '''본관''' ||[[경주 최씨]][* 사성공파(司成公派)-정무공파(貞武公派)-교리파(校里派) 18세 영(泳) 항렬.] || ||<|2> '''출생''' ||[[1884년]] [[7월 27일]] || ||[[경상도]] [[경주시|경주부]] 부내면 [[교동(경주)|교리]][br](現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경주)|교동]][* [[경주 최씨]] 사성공파-정무공파 집성촌이다.] 69번지)[* 이 지번에 바로 [[https://naver.me/xKQygzT1|경주최부자댁]]이 자리해 있다.] || ||<|2> '''사망''' ||[[1970년]] [[10월 13일]][* 음력 9월 14일.] (향년 86세)||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경주)|교동]] 59번지 자택 || || '''묘소'''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월산리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기업인]], 교육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주의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한 경주 교촌 [[최진립|최부잣집]] 12대로 그의 둘째 남동생 [[최완]]도 독립운동가였다.[* 첫째 남동생 최윤(崔潤, 초명 최영희崔泳禧, 1886. 3. 26 ~ 1969. 10. 22)이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라고 하지만 가문을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었을 뿐이었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에서도 친일행위가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나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음에도 일찍 풀려났다고 한다.] == 생애 == 1884년 7월 27일 경상도 경주부 부내면 교리(現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번지)에서 아버지 최현식(崔鉉軾, 1854 ~ 1928. 6. 20)과 어머니 [[류(성씨)|풍산 류씨]](豊山 柳氏, 1851 ~ 1932. 10. 1)[* [[류성룡]]의 후손으로, 류도휘(柳道彙)의 딸이다.]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최윤(崔潤, 1886. 3. 26 ~ 1969. 10. 22)[* 초명 최영희(崔泳禧).], [[최완]], 최순(崔淳, 1892. 10. 15 ~ 1948. 3. 22)[* 초명 최영희(崔泳禧).]이 있었다. 아버지 최현식은 경주 교촌 최부잣집 11대로, 1888년(고종 25) 식년 [[진사|진사시]]에 3등 19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88_037994|입격한 뒤]] [[서오릉|경릉]](敬陵) [[참봉]][*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2_01A_12A_00030_2004_167_XML|#]]]을 거쳐 1900년 산릉도감 감조관(山陵都監監造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7_11A_27A_00060_2005_187_XML|#]]]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21촌 지간의 족숙 최현필(崔鉉弼, 1860. 11. 30 ~ 1937. 1. 29)[* [[최진립]]의 넷째 아들 최동길(崔東吉)의 9대손이다. 1891년(고종 28) 제2회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4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91_014760|급제해]]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정7품)와 권지(權知)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종9품)를 역임했으나, [[갑오개혁]]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의 문하에서 [[http://m.gjnews.com/view.php?idx=68690|한문을 수학했으며]], 1898년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풍북면 오미동의 [[김(성씨)|풍산 김씨]](豊山 金氏) 김석윤(1884 ~ 1963. 10. 29)[* 김정섭(金鼎燮, 1862. 7. 21 ~ 1934. 4. 2)의 장녀이다.]과 결혼해 슬하에 장남 최식(崔植, 1907. 12. 27 ~ 1975. 4. 10)[*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니혼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http://db.history.go.kr/id/im_110_00502|중퇴했다]].]과 차남 최용(崔榕, 1910. 3. 8 ~ 1991. 8. 15)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어릴 적부터 사촌 매제[* [[독립유공자]] [[박상진]] 열사는 최준의 작은아버지 [[진사]] 최현교(崔鉉敎, 초명 최현설崔鉉卨, 1857 ~ 1924. 1. 15)의 장녀와 결혼했으며, 박상진과 최준은 같은 1884년생으로 동갑이지만 박상진이 최준보다 5달 늦게 태어났다.]인 [[박상진]]과 둘째 처숙부 김응섭(金應燮, 1878. 11. 15 ~ 1957. 5. 29)[* 최준의 처부(妻父) 김정섭의 둘째 남동생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차장을 역임했으나, 아직 [[독립유공자]]에는 서훈되지 않은 상태이다.]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1905년 1월 23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삼릉|효릉]](孝陵) [[참봉]], 돈녕사 주사(敦寧司主事), [[동구릉|현릉]](顯陵) 참봉, [[장릉(영월)|장릉]](莊陵) 참봉, 주전원 전무과 주사(主殿院電務課主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 효릉 참봉 : 1월 23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1A_23A_00050_2006_202_XML|임명]], 3월 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3A_02A_00050_2006_203_XML|사직]][br]* 돈녕사 주사 : 3월 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3A_02A_00060_2006_203_XML|임명]], 3월 11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3A_11A_00030_2006_203_XML|사직]][br]* 현릉 참봉 : 1차 3월 11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3A_11A_00040_2006_203_XML|임명]], 5월 8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08A_00040_2006_203_XML|사직]] / 2차 5월 9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09A_00040_2006_203_XML|임명]], 5월 21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21A_00140_2006_203_XML|사직]] / 3차 5월 2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22A_00110_2006_203_XML|임용]], 5월 23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23A_00130_2006_203_XML|사직]] / 4차 5월 24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24A_00160_2006_203_XML|임용]], 5월 25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25A_00090_2006_203_XML|사직]] / 5차 5월 26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26A_00080_2006_203_XML|임명]], 5월 29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29A_00120_2006_203_XML|사직]] / 6차 5월 30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30A_00140_2006_203_XML|임용]], 7월 21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7A_21A_00050_2006_204_XML|사직]] / 7차 7월 2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7A_22A_00060_2006_204_XML|임용]], 8월 8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8A_08A_00060_2006_204_XML|사직]] / 8차 8월 9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8A_09A_00080_2006_204_XML|임용]], 9월 1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9A_01A_00050_2006_204_XML|사직]] / 9차 9월 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9A_02A_00040_2006_204_XML|임용]], 9월 1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9A_12A_00050_2006_204_XML|사직]] / 10차 9월 13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9A_13A_00120_2006_204_XML|임용]], 10월 1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10A_12A_00060_2006_205_XML|사직]] / 11차 10월 1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10A_12A_00110_2006_205_XML|임용]] / 12차 12월 24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12A_24A_00110_2006_206_XML|임용]], 1906년 1월 1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3_01A_12A_00070_2006_206_XML|사직]][br]* 장릉 참봉 : 5월 21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21A_00150_2006_203_XML|임용]], 5월 2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05A_22A_00080_2006_203_XML|사직]][br]* 주전원 전무과 주사 : 12월 23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2_12A_23A_00080_2006_206_XML|임용]]] 1917년 사촌 매제 박상진이 이끌던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재무를 담당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고, 이 때문에 1918년 조직이 발각되었을 때 체포되었다가 1918년 10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의 예심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공갈죄|공갈]]·[[살인죄|살인]]·[[강도죄|강도]] 등의 혐의에 대해 [[면소]]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11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4071&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판결을 받고]] 곧 방면되었다. 출옥 후에는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 입단해 군자금을 헌납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마침 귀국해 있던 동생 최완에게 현금 2만 원을 맡겨 파견해 군자금으로 조달하게 했다. 1919년 5월 [[안희제]]의 백산상회가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취체역 사장 및 지배인에 취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을 때 발기인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0101500209208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10-15&officeId=00020&pageNo=8&printNo=15083&publishType=00020|참여했다]]. 1921년 9월에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경주시|경주군]] 대표로 서명했다. 이후 1921년부터 [[http://db.history.go.kr/id/hs_001_1921_08_01_0080|경남은행]](慶南銀行)[* 1921년 당시 주소는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 [[초량동]](現 [[부산광역시]] [[동구(부산)|동구]] [[초량동]]) 604번지], [[http://db.history.go.kr/id/hs_001_1921_08_01_0100|대구은행]](大邱銀行), [[http://db.history.go.kr/id/hs_001_1921_08_07_0670|고려요업]](高麗窯業)[* 1921년 당시 주소는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태평로3가|금정2정목]](現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태평로3가]]) 184번지.], [[http://db.history.go.kr/id/hs_001_1921_08_14_0690|경주상회]](慶州商會)[* 1921년 당시 주소는 경상북도 [[경주시|경주군]] 경주면 [[동부동(경주)|동부리]](現 [[경주시]] [[동부동(경주)|동부동]]) 146번지.] 등 기업의 이사 및 사원으로서 활동했고, [[http://db.history.go.kr/id/hs_002_1933_04_33_0220|경주산업조합]](慶州産業組合)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또한 대구은행과 [[http://db.history.go.kr/id/hs_001_1921_08_01_0240|해동은행]](海東銀行)[* 1921년 당시 주소는 [[경기도]] [[경성부]] [[남대문로1가|남대문통1정목]](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남대문로1가]])], [[http://db.history.go.kr/id/hs_001_1921_08_14_1180|대동사]](大東社)[* 1921년 당시 주소는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서성로1가|서성정1정목]](現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서성로1가]]) 53번지.], [[http://db.history.go.kr/id/hs_001_1923_08_01_0200|경일은행]](慶一銀行) 등에서는 [[대주주]]로서 경영에 관여하는 등 기업인으로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줄곧 겪어오던 백산무역에서의 주주와 중역들간의 문제가 점차 격화되었고, 1925년에는 감사역들에 의해 장부조사가 실시된 뒤 9월 12일 당시 취체역으로 있던 남동생 최순과 [[안희제]], [[윤병호(정치인)|윤병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207|최태욱]](崔泰旭)과 함께 감사역 문영빈(文永斌, 1891. 7. 12 ~ 1961. 10. 9)[* 본관은 [[남평 문씨|남평]](南平), 초명 문영우(文永禹). 남평문씨인터넷대동보에는 文永'''{{{+1 彬}}}'''으로 등재되어 있고, [[http://db.history.go.kr/id/im_105_00156|1913년 간행된 조선신사대동보]]에는 文永'''{{{+1 贇}}}'''으로 등재되어 있다. 초대 남평문씨대종회 회장을 역임했다.]으로부터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사기죄|사기]] 및 [[횡령죄|횡령]] 혐의로 [[https://m.blog.naver.com/stupa84/100019002561|고소당했고]], 이어 9월 19일에는 주주대표 지창규(池昌奎)·[[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719|이우식]](李祐植)·[[서상일]] 등으로부터 최준을 비롯한 중역들이 고소당하는 등 내분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 최준은 당시 [[대표이사|대표취체역]]으로 있던 동생 최순과 함께 1925년 9월 12일 이사직을 [[http://db.history.go.kr/id/gb_1925_11_30_a39840_0390|사임했고]], 백산무역 또한 1928년 1월 29일 [[http://db.history.go.kr/id/gb_1928_02_15_a03360_00430|폐업했다]]. 이때 최준은 부채 130만원을 떠안게 되었고,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조선식산은행]]장 [[http://db.history.go.kr/id/im_215_01300|아루가 미쓰토요]](有賀光豊, 1873. 5. 13 ~ 1949. 5. 31)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미쓰토요는 부채를 맡아주는 대신에 최준이 소유하고 있던 논밭과 집을 압류했고, 최준이 소유한 [[부동산]]의 권리를 조선신탁주식회사에 이관하는 계약서를 체결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최준은 [[8.15 광복]] 이전까지 줄곧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의 감시 및 통제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독립운동 지원의 과정과 일제의 신탁관리 명목의 수탈로 300년간 이어지던 경주 최부잣집의 명성은 최준의 대에서 끝났다. 그래서 마지막 최부자로 불린다. 나라가 일제에게 넘어갔을때 이회영과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을 몸소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다. 광복 후 일제의 신탁관리하에 있던 재산의 1/3을 돌려받았는데, 이를 민족문화 건설에 주역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의 목적으로 모두 사회에 환원하였다. 그 일환으로 1945년 10월 대구시 지역 유지 20여 명과 함께 경북종합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이 경북종합대학은 1947년 3월 가칭 대구문리과대학으로 개교했다가, 그해 9월 [[재단법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15&docId=534708&categoryId=46615|대구대학]](大邱大學)[*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내리리에 있는 [[대구대학교]]와는 별개의 대학이다.]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정식으로 개강했다. 1950년 4월에는 초급대학을 부설했고, 1959년 3월에는 대구여자학숙을 병설하기도 했다. 최준은 집안의 모든 재산과 집, 선산, 교촌마을에 살던 일가 친척들의 집까지 모두 대구대학 재단에 기부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대구대학은 1960년대 이후 재정난에 빠져 당시 대구대학 교수로 있던 [[신현확]]의 주선으로 1964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에 경영권을 넘기게 되었고, 최준은 재단 이사에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2385.html|취임했다]]. 그러나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삼성그룹은 대구대학 재단을 [[박정희 정부]]에 헌납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1967년 12월 [[영남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준은 군사정권에 재단이 넘어가는 것에 대해 격렬히 반발했으나 끝내 막지 못했고, 대구대학 재단 소유였던 최준의 사재와 선산 등이 모두 [[학교법인]] 영남학원에 이관되었다. 1970년 10월 13일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59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0101500209208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10-15&officeId=00020&pageNo=8&printNo=15083&publishType=00020|별세했다]]. 향년 86세. 사후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표창(상)|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 여담 == * 장남 최식의 장녀 최희(崔熙)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9285&docId=1798281&categoryId=49285|동계 정온 종가]](桐溪 鄭蘊 宗家)의 14대 종손인 [[초계 정씨]] 정우순(鄭禹淳)과 결혼했으며, 차녀 최소희(崔小熙)는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의 [[유성룡]] 종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73&docId=529943&categoryId=46673|충효당]](忠孝堂)이라고 한다.]의 14대 종손인 [[류(성씨)|풍산 류씨]] 류영하(柳寧夏)와 결혼했고, 3녀 최경희(崔瓊熙, 1934. 11. 8 ~ 1965. 4. 11)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194386&categoryId=33080|학성이씨 근재공 고택]](鶴城李氏 謹齋公 古宅)[* 근재(謹齋)는 [[학성 이씨]] 시조 이예(李藝, 1373 ~ 1445. 2. 23)의 10대손 이의창(李宜昌, 1725. 9. 16 ~ 1781. 7. 25)의 호이다.]의 8대 종손 [[학성 이씨]] 이유환(李惟煥, 1929. 7. 9 ~ )과 결혼했다. 이 세 명의 손녀 모두 당대의 명문가와 혼맥이 이어져 있는데, 최준이 생전에 직접 이들의 혼인을 주관했다고 한다. * 장증손자 최성길(崔成吉, 1961. 12. 24 ~ )은 제3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28기로 수료한 [[법조인]]이다. 현재는 [[법무법인]] 해송의 [[변호사]]로 재직 중에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경주 최씨 사성공파]][[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1884년 출생]][[분류:197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대학교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