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种世衡, 985~1045 북송의 장수. 자는 중평(仲平)으로, [[충악]]의 아버지이자 [[충사도]]의 조부. 하남 낙양 출신이다. 종세형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충세형의 이름자 중 种은 어릴 충, 씨 종 이 두 가지의 뜻과 음이 있다.] 청간성을 축조함으로써, 서하를 억제하였다. 충악, 충사도와 함께 충가장의 일원. == 생애 == 985년 출생으로, 그는 어려서 절개를 숭상하였는데, 형제 중에 그 재산을 나누려는 자가 있었음에도 그는 전부 사양했다. 처음에는 숙부 덕택에 감주부가 되어 그 뒤 여러 차례 태자중사로 승진했다. 그 뒤 경양 현령을 지냈는데, 왕지겸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취한 사실이 드러나 법령에 따라 징역형을 선고받고 도망갔다. 사면 뒤 왕지겸은 관청에 자진 출두했고, 그 뒤 사면되었다. 나중에 봉주를 통판했고, 왕몽정이 그에게 사익을 구했으나, 충세형이 따르지 않자, 왕몽정은 화가 나서 왕지겸으로 하여금 억울함을 호소하도록 유인하였고 그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여주로 이주하였다. 동생 충세재는 형 대신 벼슬을 보내 속죄하고 맹주 사마에 임명되었다. 한참 후 용도각 직학사 이굉이 그를 변호하고, 그 뒤 위위사승에 임명된 뒤 수주감주·동주조서·반주판관사를 역임하였다. 충세형이 살았던 때는 [[서하]]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당시 서부 국경에 군사를 투입시켜 수비가 부족해지자 연주의 동북 200리 안에 있는 고관주를 폐성으로 삼아 서하의 예봉을 막아 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정은 그의 건의에 동의하여 그에게 이 공사를 맡겼다. [[서하]]군이 여러 번 출격하여 싸웠고, 그는 싸우면서 성을 쌓았는데, 샘물이 없어 모든 사람이 방어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땅을 깊이 파 돌이 이에 맞았더니 석공은 돌이 뚫리지 못한다고 여겼고 충세형이 자갈을 삼태기로 쳐서 백 전을 받고 마침내 샘물을 얻었으며, 성을 축조하여 청간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내전숭반(內殿崇事), 지청간성사에 올랐고, 충세형이 성을 지키는 동안 청간성은 부유하였다. 그는 성을 지키는 동안 강족 추장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서하]]군이 침공할 때 강족들이 이를 알려주어 서하군을 막아낼 수 있었고, 서하군은 환주를 넘볼 수 없었다. 이후 동염원사(東院院使), 환경로(環慶路) 병마검할(兵馬辖辖)에 올랐다. [[범중엄]][* [[악양루기]]로 유명하다.]은 장해로 하여금 세요성을 쌓게 했는데, 이때는 충세형이 병석에 누운 시기였다. 그럼에도 충세형은 병석에서 일어나 소부갑사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성을 쌓고 그것이 완공된 해인 1045년 세상을 떠났다. 강족 추장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청간성과 환주 사람들은 사당을 세워 그의 죽음을 추도했다. 이후 그 아들 [[충악]]이 그의 연줄로, 청간성을 지키게 된다. == 평가 == >서하를 평정한 공로는 충세형의 계략이 많았으나 당시에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였나이다. >----- >[[심괄]][* 북송 시기 유명한 과학자이나 인성에 문제가 많았다. 이후 1082년 [[서희(북송)|서희]]와 함께 영락성 축조를 주장하여 영락성을 축조했으나, 결과는 서하군에게 함락되고 서희는 서하군과의 난전 중 전사.] >나라에 힘쓴 신하이옵니다. >----- >[[범중엄]] == 기타 == 충세형은 지장이었다. [[심괄]]의 《[[몽계필담]]》에 의하면, 충세형이 서하와 맞설 때 반간계를 써서 서하의 두 중요한 장수인 야리왕영과 야리우걸을 제거했다고 한다. 이 둘은 낭매라는 장수를 북송에 투항하게 했고, 충세형은 왕숭이라는 스님을 서하로 보내 야리왕영 형제가 송나라에 귀순하려 한다고 했고 그가 보낸 사자인 낭매는 이미 전역을 치러 갔다. 이원호는 놀라서 급히 측근들을 송 진영에 보내 확인하게 했고, 충세형은 서하 사람들이 야리왕영이 정말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결국 이원호는 확인도 안한 채 야리왕영과 야리우걸을 처형하고 그들의 아내를 차지한다. === 충가장 === 아들 충악, 손자 충사도와 함께 충가장의 일원이다. 충세형은 용맹스럽게 싸울 뿐만 아니라 지혜도 풍부하여, 이러한 계략들은 그가 [[서하]]에 대항한 전쟁, 특히 고육계와 미인계, 이간계의 세 가지 계책을 교묘하게 구사하여, 서하의 날뛰는 기세를 꺾고, 서하의 전략 배치를 어지럽히고, 그의 가호위국의 개세공훈을 실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아들 충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청간성을 수비하는 등 서하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손자 충사도는 [[북송]]의 항금명장 중 하나이다. [[동관(북송)|동관]] 휘하에서 서하 전선에서 활약하고, 이후 해상의 맹 이후 연경을 공략하나 패하고[* 이때 [[연운 16주]]의 한인들은 북송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했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망해가는 상황이었는데도, 연운 16주의 통치는 안정적이었다고 한다.][* 동관이 이끄는 군대가 야율순, 소간이 이끄는 북요 정권에 패한 뒤 연경 사람들과 소간은 북송 사람들을 무시했다고 한다.], 동관에게 차라리 [[요나라]]와 연합하자고 간하나 묵살당하고 만다.[* 북송 내에서 유일하게 [[금나라]]의 야심을 간파했던 사람이었다.] 나중에 [[정강의 변]] 시기 금나라가 송군을 공격할 때, 서하와의 국경을 지키던 송군을 소환하라고 청했으나 조정에 의해 묵살당하고, 이후 병사한다. [[분류:송나라/인물]] [[분류:985년 출생]] [[분류:1045년 사망]] [[분류:뤄양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