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해당 탑의 별칭에서 따온 중앙탑면, rd1=중앙탑면)] [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보|{{{#f39100 대한민국 국보 제6호}}}]]''' || ||<-2> {{{#fff {{{+1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br]{{{-1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 '''{{{#fff 수량/면적}}}''' || 1기 || || '''{{{#fff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fff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8세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C3%E6%C1%D6_%C5%BE%C6%F2%B8%AE_%C4%A5%C3%FE%BC%AE%C5%BE.jpg|width=100%]]}}} || || {{{#fff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 || [목차] [clearfix]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JAN0xEFFmmU, start=8)]}}} || || {{{#fff ''' 충주MBC 캠페인 충주 탑평리칠층석탑 '''}}} || [br] == 개요 ==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남한강]] 옆 강가 언덕 위에 위치한, 전체 높이 14.5 m [[화강암]]제 칠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본 석탑은 일명 중앙탑(中央塔)이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통일신라 전국토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사람이 동시에 출발하여 같은 보폭으로 걸어 만난 국토의 중앙지점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남한의 정중앙이 [[충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한 듯 싶다.[* 물론 통일신라시대 당시 북쪽 경계는 지금의 [[군사분계선|휴전선]] 라인이 아니라 더 북쪽의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이었다.][* 신라의 김필이라는 명필 서예가가 말년에 반송마을에 큰 절을 세우고 탑을 건립했다가 풍수설에 따라 탑만 옮겼다는 설과 근처를 지나던 경주 송림사 주지가 보라색 안개를 보고 왕기(王氣)를 느껴서 누르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1962년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중앙탑 소재지인 중앙탑면의 명칭은 본래 가금면(可金面)이었는데, 이 탑에서 이름을 따서 2014년에 지명을 중앙탑면(中央塔面)으로 바꿨다. [[평택제천고속도로]]에 있는 [[졸음쉼터]] 이름도 중앙탑에서 따와 중앙탑 졸음쉼터다. == 내용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시대 [[석탑]] 중 크기가 가장 크며,[* 신라시대 탑 중에서 현존하는 최대 탑은 17 m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인데, 석탑이 아니라 흙으로 벽돌을 구워 쌓은 [[전탑]]이다.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81 m인 [[황룡사]]지 9층목탑이 가장 높았다.] 7층의 지붕돌[* 이를 옥개석(屋蓋石)이라고도 한다.]이 균형미를 갖추고 14.5 m 높이로 솟아 있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세월의 흐름에 의해 기단과 몸돌에 금이 가거나 약간 깨진 부분이 있는 등 소실된 부분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본 석탑도 현전하는 대다수의 다른 탑들처럼 꼭대기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은 이미 사라지고 없으며, 머리장식 받침 정도가 남아 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7층의 몸돌[* 이를 탑신(塔身)이라고도 한다.]과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본 석탑은 워낙 크기도 크고 높이도 높은지라 보는 사람에게 웅장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탑 1층의 몸돌은 크게 해놨고, 위로 올라 갈수록 몸돌과 지붕돌의 크기가 차츰 줄어들어 비례감이 느껴진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충주_탑평리_칠층석탑|한국어 위키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다만, 하단부에 비해 높이가 너무 높아서 탑의 전체적인 균형감과 안정감은 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1402&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3715&cid=40942&categoryId=37154|두산백과 -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본 석탑은 신라의 다른 거탑들처럼 기단부와 각 층의 몸돌을 여러 개의 돌들로 조립해서 만들었다. 하지만 6층의 몸돌부터는 여러개의 돌을 짜맞춘 것이 아니라 돌덩이 하나로 만들었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5860&cid=46710&categoryId=46710|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중원탑평리칠층석탑]]] 그리고 기단의 네 면과 각 층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형 장식[* 이를 탱주(撑柱)라고 한다.]을 양각으로 새겨놨다. 한편 지붕돌의 하단에는 5단으로 이루어진 역계단형 받침 장식이 있으며 지붕돌의 각 모서리는 위를 향하게 들려 있는데 이는 경쾌한 인상을 준다고 평가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1402&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또한 지붕돌을 자세히 보면 각 모서리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는 [[풍경#s-2]]을 매달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1402&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이상에서 드러나는 탑의 건축방식과 장식들로 미루어봤을 때, 본 석탑의 축조연대는 아마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의 현재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당시에는 탑이 기운다고 판단하여 전면적인 해체수리를 하였다. 이때 탑의 기단과 6층 몸돌에서 청동거울, 나무함, 은제사리함 등의 사리장엄구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장엄구 가운데 청동거울 두 점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여서, 아마도 신라 때 탑을 건립하고 고려에 들어서 다시 한 번 탑을 열고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다고 추정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1402&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그런데 일제가 수리를 한 것까지는 좋은데, 기단과 탑신부에 부재들을 어긋나게 끼워넣는 등 복원을 잘못하는 바람에 탑의 원형이 다소 변형되어버렸다고 한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5860&cid=46710&categoryId=46710|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중원탑평리칠층석탑]]]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국보6호충주탑평리칠층석탑.jpg|width=100%]]}}} || || {{{#fff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전경. 석탑 앞에 석등 받침 유구가 보인다. '''}}}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서있는 곳에는 본래 큰 사찰이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이 전무하여 더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다.[* 다만 중앙탑 주변에 기왓장이나 약간의 유구가 남아 있어서, 여기가 절터라는 것 정도는 추측 가능하다. 출처: [[http://www.heritage.go.kr/heri/cul/hubBankDetail.do?expId=20151006000000412670|문화재청 홈페이지 - 충주 탑평리 사지(忠州 塔坪里 寺址) 조사연구자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1402&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하지만 충주는 현대의 [[광역시]]와 비슷한 [[통일신라]]의 [[9주 5소경|5소경]] 중 하나인 중원경일 정도로 당시 전국에서 손꼽히는 중요 도시였기 때문에, 이만한 탑을 경내에 두었고 지금은 이름이 잊혀진 이 절은 당시 중원경의 신앙을 대표하는 사원이었을 테고 규모와 역할도 상당히 컸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예로 마찬가지로 5소경이었던 [[남원시]]에 있는 [[실상사]] 목탑지가 있다. 여기에서 백제나 신라의 수도 유적에서나 있을 법한 거대한 통일신라 목탑의 흔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대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그 자체의 형태와 아름다움이 잘 남아 있으며, 현전하는 통일신라의 가장 거대한 석탑이라는 점, 당대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면서도 신라 중원 지방의 문화를 대표할만한 작품이라는 점 등 가치를 인정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 기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충주일대유적분포도.jpg|width=100%]]}}} || || {{{#fff ''' 구글 어스로 보는 지도 '''}}} || 충주 지방이 고대로부터 한반도의 중요지역이자 요충지였던 것을 반영하듯,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주변으로 선사유적과 [[장미산성]], [[누암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여러 고대 유적들이 남아 있다. 또한 탑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국보 제205호인 [[충주 고구려비]]가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충주_탑평리_칠층석탑|한국어 위키백과: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1402&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5860&cid=46710&categoryId=46710|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중원탑평리칠층석탑]]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3715&cid=40942&categoryId=37154|두산백과: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 문화재청 소개글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0060000,33&pageNo=5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있어, 일제당시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충청북도 충주시의 문화재)] [[분류:대한민국의 국보]][[분류:석조 불탑]][[분류:신라의 공예]][[분류:충주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