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오스트리아 대통령]][[분류:오스트리아 총리]][[분류:1870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남모라바 주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오스트리아 총리)] [include(틀:역대 오스트리아 대통령)] ---- ||<-2><#D81E05> '''[[오스트리아 총리|{{{#fff 오스트리아 제12대 총리}}}]]''' || ||<-2> '''[[오스트리아 대통령|{{{#FAE102 오스트리아 제3대 연방대통령}}}]][br]{{{#FAE102 {{{+1 카를 레너}}}[br]Karl Renner}}}'''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Karl_Renner_1905.jpg|width=100%]]}}}|| ||<|2> '''출생''' ||[[1870년]] [[12월 14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 돌니 두나요비체 || ||<|2> '''사망''' ||[[1950년]] [[12월 31일]] (향년 80세) ||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 공화국]] [[빈(오스트리아)|빈]] || ||<|6> '''재임기간''' ||초대 연방총리 || ||[[1918년]] [[10월 30일]] ~ [[1919년]] [[10월 21일]] || ||제12대 연방총리 || ||[[1945년]] [[4월 27일]] ~ [[1945년]] [[12월 20일]] || ||제3대 연방대통령 || ||[[1945년]] [[12월 20일]] ~ [[1950년]] [[12월 31일]] || || '''정당''' ||[include(틀: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 || '''가족''' ||배우자 루이즈 레너 || || '''경력''' ||내무부 장관[br]외무부 장관[br]'''오스트리아 초대·제12대 연방총리'''[br]'''오스트리아 제3대 연방대통령'''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스트리아의 초대 및 제12대 연방총리이자 제3대 대통령으로 현대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국부]]'''로 간주된다. == 생애 ==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나고 찾아온 [[전간기]] [[오스트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의 지지세가 매우 높았고, [[독일 공산당|공산당]]과 끝없이 투쟁해야했던 독일 본토의 사회민주당과는 다르게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장애물 없이 노동자들의 몰표를 받았기 때문에 공산당에 의해 위협받을 일도 없었다. 카를 레너는 이 사회민주당의 수장으로 초대 총리가 되어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대독일 통일을 제창했지만 협상국에 의해 거부당했고, 오히려 [[티롤]]과 [[주데텐란트]] 지방을 잃으면서 정치적으로 타격을 좀 입었다. 그럼에도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무난하게 총리로 재임하며 공화국 오스트리아의 기반을 닦았다. 향후 레너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써 계속 활동하지만, [[안슐루스|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여기 어울리지 않고 정치에서 완전히 은퇴한 뒤 나치의 협력 제안을 원천 거부한다. 정확히는 당초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에 찬성하였으나 순간의 광기로 끝날 줄 알았던 [[나치즘]]이 오스트리아까지 완전히 지배해버리게 되자 거리를 두게 된 것에 가깝다.[[https://www.nytimes.com/1985/03/30/opinion/l-austria-welcomed-hitler-and-its-anti-semitism-persists-129701.html|#]] 이 영향인지 소련군이 오스트리아에 진주하자 레너를 총리로 추대했는데, 레너는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연합군 군정기]]에 사회민주노동당(SDAPÖ)의 당수이자 총리로서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재건국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소련의 요구로 내각 장관의 1/3과 내무장관, 교육부 장관을 공산당원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동시에 두 부서의 차관 두 자리에 공산당이 아닌 인사를 임명하여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소련의 희망대로 공산화되거나 [[독일연방공화국|독일]]처럼 분단되는 것을 막았다. 오히려 소련에서 오스트리아 독립을 위해 자신들을 이용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 원로로서의 본인의 인망 역시 높은 편이어서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역시 레너를 소련이 보낸 괴뢰 정치인이라 의심하지 않고 믿을 만한 정치인으로 인식하여 신뢰를 보냈다. 동독의 오토 그로테볼이나 북한의 [[조만식]]처럼 [[소련]]에 의해 '공산국가가 아닌 국가를 세우려는 겉포장'처럼 이용되다가 버려질 수도 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가 분단되지 않고, 또 공산화되지도 않고 남은 것은 레너의 업적인 셈. 결국 소련의 기대와 달리, 1945년 11월 열린 전후 첫 총선에서 레너와 사회민주당은 76석을 확보해 겨우 4석 확보에 그친 공산당을 압도했고 보수 성향 [[오스트리아 인민당|인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해 공산당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로에 힘입어 12월 20일, 총선 결과에 따라 재건된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오스트리아의 세번째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여기에는 특기할 만한 점도 있는데, 동독의 군정지휘관이었던 [[소련군]] [[바실리 소콜롭스키]] 원수나[* 본래는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동독 지역을 맡았고, 어느 정도 서방과의 협상도 진행되고 있었지만 2차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각한다.] 북한 지역의 내정을 [[이반 치스차코프|치스차코프]] 장군 대신 맡아 공산당 아닌 정치세력을 모두 극렬히 탄압한 [[정치장교]] 출신 [[테렌티 시티코프]] 장군에 비해 오스트리아에 진주한 [[표도르 톨부힌]] 원수는 특이하게도 소련 내에서도 덕장으로 유명한 인물로, 본래 소련에 피란을 와 있던 오스트리아의 망명 공산주의자로 공산국가를 세우려던 스탈린의 계획에 반대하고 현지의 명망있는 정치인으로 레너를 선택해 스탈린의 마음을 돌리게 해 결과적으로 레너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1950년 12월 31일, 대통령으로써의 임기를 보내던 도중 사망했고 사후 빈에 있는 중앙 묘지 대통령 무덤에 안장되었다. [[반유대주의]]자였다[*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현재와는 달리 그 이전에는 좌파에 반유대주의가 있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유럽에서 반유대주의자 아닌 사람을 찾기 힘들다.]. 장관직에서 [[유대인]]을 배제했고,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유대인들을 매몰차게 외면한 것도 비판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