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00년 출생]][[분류:1984년 사망]][[분류:다름슈타트 출신 인물]][[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나치당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 [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카를 볼프.jpg|width=100%]]}}}|||| ||<#666> {{{#FFF 이름}}} ||<(>'''Karl Friedrich Otto Wolff'''[br] 카를 프리드리히 오토 볼프|| ||<#666> {{{#FFF 출생}}} ||<(>[[1900년]] [[5월 13일]], [[헤센 대공국]] 다름슈타트 || ||<#666> {{{#FFF 사망}}} ||<(>[[1984년]] [[7월 17일]], [[서독]] 로젠하임 || ||<#666> {{{#FFF 신장}}} ||189cm || ||<#666> {{{#FFF 복무}}} ||<(>[[슈츠슈타펠]] (1931년 ~ 1945년) || ||<#666> {{{#FFF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계급)|대장]] (상급집단지도자) || ||<#666> {{{#FFF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제2차 세계 대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카를 볼프 중장.jpg|width=100%]] || [[나치 독일]]의 친위대 대장. == 초기 행적 == 독일제국령 [[헤센 대공국]]의 다름슈타트에서 지방재판소의 재판관이던 부친아래 태어난 카를 볼프는 가톨릭 계열의 학교에서 수학 후 [[1917년]] [[4월]]에 16세로 헤센 대공국군에 입대했다. 유년사관학교에서 연수를 거쳐 [[1917년]] [[9월]]에 [[제1차 세계 대전]]때 [[서부전선]]에 종군하여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했다. [[1918년]]에 17세로 소위가 된 볼프는 전후 헤센의 의용군에도 참가했는데 이 때 전쟁공훈이 인정되어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행적 ==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대보유가 제한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밀려난 그는 [[1920년]] [[5월]]에 제대하여 [[프랑크푸르트]]에서 은행에 입사했다가 [[1922년]]에 프리더 폰 롬헤르트와 결혼했다. [[1923년]]에 아내와 함께 [[뮌헨]]으로 이사한 볼프는 독일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1924년]] [[6월]]에 경제공황때 실직하고 말았다. 그 후 굉고회사에서 일한 볼프는 [[1925년]] [[7월]]부터 자신이 직접 광고회사를 차려 독립개업했다. == 나치당과 친위대 입대 == 세계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1년]] [[10월 7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볼프는 다시 친위대에도 입대했다. [[뮌헨]]에서 광고회사를 꾸려 나가면서도 뮌헨의 친위대 활동에 종사한 볼프는 [[1932년]] [[2월]]에 친위대 소위가 되었다.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당무에 전념한 볼프는 친위대 대위로 승진해 나치당의 간부였던 [[프란츠 리터 폰 에프]]의 부관이 되어 독일 국방군과의 사이에서 연락장교의 역할을 맡았다. 얼마 후 [[하인리히 힘러]]의 눈에 든 볼프는 [[1933년]] [[6월]]부터 힘러의 부관부서인 친위대 국가지도자 개인참모부의 장관이 되었다. [[1937년]]에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한 볼프는 [[1939년]] [[8월]]부터 [[히틀러]]의 친위대 연락장교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볼프는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이어서 친위대 서열 3위로 올라앉게 되었다. 볼프의 친위대 국가지도자 참모부에는 친위대의 모든 서류 사본이 모아졌다.[* 그 속엔 전시 [[홀로코스트]] 관련서류도 있었기에 볼프는 전후 재판시 나치의 잔학행위에 알지 못한다고 증언했지만 알지 못했다는 사실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 || [[파일:카를 볼프 대장.jpg|width=100%]] || || 왼쪽이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 [[슈츠슈타펠|SS]][[중장]], 카를 볼프, 오른쪽이 [[하인리히 힘러]] [[슈츠슈타펠|SS]][[장관]]이다. || [[1942년]] [[5월]]에 하이드리히 암살사건으로 인해 힘러와 볼프의 관계는 나빠졌다. 이 때 힘러는 볼프를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시키는 한편으로 이탈리아로 파견해 그와 멀리하게 되었다.[* 단 친위대 국가지도자 개인참모부 장관자리는 패전까지 유지했다.] 볼프는 [[1943년]] [[2월]]부터 이탈리아 지역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로 임명되어 이탈리아에서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3년]] [[7월]]부터는 경찰최고지도자로 승격했다. [[9월]]에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이탈리아 북부의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서 근무한 볼프는 이때 아내와 이혼했다. 한편 로마 가톨릭 산하의 이탈리아 신문인 에 의하면 히틀러는 로마 교황인 [[비오 12세]]의 납치를 볼프에게 명령했지만 볼프는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1945년]]에 연합군이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하자 볼프는 이탈리아 방어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가 되어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총력전을 명령했지만 [[1945년]] [[5월]]에 독일의 항복으로 볼프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 전후 행적 == || [[파일:말년의 카를 볼프.jpg|width=100%]] || || 말년의 볼프 || 전후 볼프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연합국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후 친위대의 지도자로서 [[서독]] 정부에게 기소되어 [[1948년]] [[11월]]에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7개월 후 징역 4년으로 감형된 후 가석방된 볼프는 [[1949년]]부터 다시 광고회사를 개업했다. 이 때 [[미국]]의 [[CIA]]에 협력했다고도 하는데 [[1962년]]에 다시 [[이스라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때 볼프가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의 강제수용소 이송에 조직적으로 관련했다는 혐의로 [[서독]] 정부는 그가 30만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것을 확인하여 다시 볼프를 기소했다. 서독 재판소는 다시 그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지만 [[1969년]]에 건강악화를 이유로 석방되어 볼프는 [[1984년]]에 로젠하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