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 ||<-2>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br]{{{+1 카를 프리드리히}}}[br]Karl Friedrich, Herzog von Holstein-Gottorp'''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Charles_Frederick_of_Holstein-Gottorp_by_anonymous.jpg|width=100%]]}}} || || '''이름''' ||카를 프리드리히[br](Karl Friedrich)|| || '''출생''' ||[[1700년]] [[4월 30일]][br][[스웨덴]] [[스톡홀름]]|| || '''사망''' ||[[1739년]] [[6월 18일]] (향년 39세)[br]륌펠|| || '''배우자'''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br],,(1725년 결혼 / 1728년 사망),,|| || '''자녀''' ||[[표트르 3세]]|| || '''아버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 || '''어머니''' ||[[헤드비그 소피아|스웨덴의 헤드비그 소피아]]|| [목차] [clearfix] == 개요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의 공작이자 스웨덴의 왕족.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의 수장이였다. 본인은 변방 소국의 군주로 여생을 보냈지만, [[스웨덴]] [[칼 11세]]의 외손자, [[칼 12세]]와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외조카, [[러시아 제국]] [[표트르 1세]]의 사위로서 스웨덴 왕국의 왕위와 러시아 제국의 황위를 노렸던 인물이었으나 둘 다 실패로 끝나고 덴마크에 거의 다 뺏겨 얼마 안 남은 작은 영지만을 유지한 채 사망했다. 그나마 본인 사후에 아들 카를 페터 울리히가 [[표트르 3세]]가 되었다. == 생애 == 카를 프리드리히는 1700년 4월 30일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1671 ~ 1702)와 스웨덴 공주 [[헤드비그 소피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친부가 [[대북방 전쟁]]에서 전사하자 아버지를 잃었다. 친할아버지인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는 카를 프리드리히가 태어나기 전인 1695년 이미 사망했고, 친할머니 페데리카 아말리아 역시 얼마 안 가 1704년 사망했기에 카를 프리드리히는 외가인 스웨덴 왕가에 맡겨 키워지게 되었다.[* 숙부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1673 ~ 1726)와 고모 마리 엘리자베트(1678 ~ 1755)가 살아있었으나 숙부는 섭정만 맡았고(그것도 헤드비히 소피아와 공동으로) 고모는 수녀였다.] 생모인 [[헤드비그 소피아]]는 지혜롭고 처신에 능한 인물로, 아들 카를 프리드리히를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게 키웠는데, 그러던 헤드비그 소피아가 1708년 갑작스레 요절하면서 아들과 며느리, 손녀를 먼저 보낸 증조할머니 헤드비히 엘레오노라(1636 ~ 1715, [[칼 10세 구스타브]]의 왕비)가 카를 프리드리히를 키우면서 부모를 잃은 카를 프리드리히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오냐오냐 키웠고, 이 때문에 카를 프리드리히는 성격도 나빠지고 무능한 인물로 성장했다. 1718년, 외삼촌인 [[칼 12세]]가 미혼이고 자녀도 없는 상태에서 전쟁 중에 전사하자 카를 프리드리히는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카를 프리드리히의 모친 [[헤드비그 소피아]]가 이모인 [[울리카 엘레오노라]]보다 언니이기 때문에, 원래 계승법상으로는 헤드비그 소피아의 아들인 카를 프리드리히가 울리카 엘레오노라보다 계승서열이 앞서지만, 스웨덴 의회가 카를 프리드리히에게 하도 질려서, 입헌군주제를 준수한다는 전제 하에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손을 들어주었다.[* 비슷한 예가 [[앙리 5세]]이다. 프랑스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와 [[루이 19세]]가 퇴위하면서 본래 계승서열이 더 앞선 앙리 5세가 즉위했어야 했으나, 프랑스 의회에서 전제군주적인 부르봉 본가 소속 앙리 5세의 즉위를 부정하고 입헌군주제에 우호적인 계승서열이 먼 방계 친척 [[루이필리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카를 프리드리히는 이모에게서 스웨덴 왕위를 되찾으려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1세]]의 딸 안나 페트로브나와 결혼하였다. 후일 카를 프리드리히의 친손자인 [[파벨 1세]]가 차르 계승권을 남계 계승만 가능하도록 법을 바꾸기 전까지는 당시 로마노프 왕조는 현임 차르가 후임 차르 후계자를 지목하는 지명승계제였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사위인 카를 프리드리히도 기회만 잘 타면 러시아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당장 장인인 [[표트르 1세]]가 친손자 [[표트르 2세]]가 어리다는 이유로 완전 쌩 평민 출신인 후처 [[예카테리나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점에서 외국인이지만 엄연한 귀족 타이틀이 있는(그것도 타국 왕족과 동등결혼이 가능한 신분이었다) 카를 프리드리히가 황제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당장 장인 [[표트르 1세]] 사후 본인의 아들 [[표트르 3세]]가 즉위할 때까지 [[예카테리나 1세]]-[[표트르 2세]]-[[안나 이바노브나|안나 여제]]-[[이반 6세]]-[[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옐리자베타 여제]] 순으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였기 때문에 카를 프리드리히가 오래 살았다면 아들 [[표트르 3세]]보다 선순위로 즉위할 수 있었다. ] 그러나 1728년 안나 페트로브나가 외아들 [[표트르 3세]]를 낳자마자 불과 2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러시아 황실의 그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카를 프리드리히에겐 기회가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카를 프리드리히는 1739년 불과 39세의 나이로 스웨덴 왕위와 러시아 제국 황위를 둘 중 하나도 얻지 못하고 이미 있는 영지조차 덴마크에 거의 다 뺏긴 채로 사망했다. 그나마 하나뿐인 아들인 [[표트르 3세]]가 처제이자 표트르의 이모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사실상 양자로 들어가 여제 사후 러시아 제국 황제가 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직전까지 표트르 3세 이후 모든 차르들은 전부 카를 프리드리히의 후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딱 한 번 다른 가문이 통치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며느리인 [[예카테리나 2세]]다. ] == 가족관계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 '''1남''' || [[표트르 3세]][br]{{{-2 (Peter III)}}} ||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 || [[예카테리나 2세]][br]슬하 1남 1녀[* [[파벨 1세]] 등] || [[분류:1700년 출생]][[분류:1739년 사망]][[분류:스웨덴의 왕자]][[분류: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분류: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분류:스톡홀름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