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파르마 공국의 카를로 2세, rd1=카를로 2세(파르마), other2=나폴리 왕국의 카를로 2세, rd2=카를로 2세(나폴리))] [include(틀:역대 사보이아 공작)]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a0000, #cd0000 20%, #cd0000 80%, #9a0000)" '''[[사보이아 공국|{{{#fff 사보이아 공작}}}]][br]{{{+1 카를로 2세}}}[br]Carlo II, Duca di Savoia'''}}}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Carlo_III_di_Savoia.jpg|width=100%]]}}} || ||<|2> '''출생''' ||[[1486년]] [[10월 10일]] || ||[[사보이아 공국]] 샤제쉬랭 || ||<|2> '''사망''' ||[[1553년]] [[8월 17일]] (향년 66세) || ||[[사보이아 공국]] [[베르첼리]] || || '''묘소''' ||베르첼리 대성당 || ||<|2> '''재위기간'''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 ||[[1504년]] [[9월 10일]] ~ [[1553년]] [[8월 17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필리포 2세]][br]어머니 브로스의 클로드 || || '''배우자'''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1521년 결혼/1538년 사망),, || || '''자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아드리아노, 루도비코,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카테리나, 마리아, 이사벨라, 잔마리아, 에마누엘레, 에마누엘레 || || '''가문''' ||[[사보이아 가문]] || || '''종교''' ||[[로마 가톨릭]] ||}}}}}}}}} || [목차] [clearfix] == 개요 ==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작위)|공작]]. 실질적으로 마지막 [[프랑스/문화|프랑스 정체성]]을 가졌던 [[사보이아 가문]]의 군주이다.[* 사보이아 가문은 프랑스([[사부아]])와 이탈리아([[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 사이에 걸쳐 있으면서 [[프랑스인]]이라기에는 이탈리아같고, 반대로 [[이탈리아인]]이라기에는 프랑스 같은 애매한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래도 대체적으로는 프랑스에 가까워지려고 했으나 [[이탈리아 전쟁]]을 겪은 후 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토리노]]로 [[천도]]하면서 이탈리아인으로 정체성을 완전히 굳혔다.] == 생애 ==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와 클로딘 드 브로스(Claudine de Brosse 1450~1513)의 맏아들로, 1504년 이복형 [[필리베르토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사보이아 공작으로 즉위했다. 1521년 [[포르투갈 왕국]]의 공주 베아트리즈(Beatriz de Portugal 1504~1538)와 결혼했다. 1513년, [[제네바]]에서 필리베르 베르틀리에(Philibert Berthelier 1465~1519)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1530년 제네바의 개혁가 프랑수아 보니바르(François Bonivard 1493~1570)를 시옹 성에 수감했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시옹의 죄수(The Prisoner of Chillon)를 집필했다.] 1534년, 제네바에서 이번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폭동이 일어나자 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역으로 털렸다. 1535년, 2번째로 군대를 보냈으나 또(...) 털렸고 권위만 실추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부인의 언니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황후 [[포르투갈의 이자벨|이자벨]]이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는 카를로 2세의 이복누나였다.]는 [[사보이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맹도 분쇄할 겸 [[사보이아 공국]]을 [[밀라노 공국]] 탈환의 교두보로 삼을 목적으로 1536년에 사보이아 공국을 침공했다. 수도 [[샹베리]]와 핵심 도시 [[토리노]]가 연달아 [[프랑스군]]에게 함락당했고, [[베른]] 시민들이 프랑스의 침공에 편승하여 쳐들어와 [[보 주|보]]와 키아블레세(Chiablese)[* [[에비앙레뱅]]이 있는 [[사부아]]의 역사적인 지명. [[프랑스어]]로는 샤블레(Chablais).]의 통제권까지 상실했다. [[베르첼리]]로 후퇴한 카를로 2세는 있는 자원을 쥐어짜 마지막으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발레다오스타]], [[니스|니차]], [[쿠네오]], 베르첼리 정도를 제외한 공국 대부분을 잃은 후 유일한 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를 카를 5세에게 보낸 후 본인은 베르첼리에서 포위되어 지내다 1553년 사망했고 베르첼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 기타 == * 기존에는 카를로 2세를 카를로 3세로 불렀으나 이는 [[사보이아 가문]]의 역사를 집필한 17세기 프랑스의 역사학자 사뮈엘 귀케농(Samuel Guicenon 1607~1664)의 저서에 따른 관습적인 [[세]] 계승이었는데, 최근 [[고고학]] 발굴과 문헌 고증을 거쳐 기존의 카를로 2세는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Carlo Giovanni Amedeo/Charles-Jean-Amédée)로 불렸으며, 카를로 3세는 카를로 2세(Carlo II di Savoia/Charles II de Savoie)로 불렸음이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3국의 사학계에서 검증되었다. [각주] [[분류:1486년 출생]][[분류:1553년 사망]][[분류:사보이아 공작]][[분류:사보이아 가문]][[분류:앵 출신 인물]][[분류:베르첼리 대성당 안장자]][[분류:이탈리아의 가톨릭 신자]][[분류:프랑스계 이탈리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