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86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독일의 귀족]][[분류:제3제국/인물]][[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독일 국방군/인물]] [include(틀:독일 국방군/장성급 장교)]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jpg|width=100%]]}}} || ||<#666> {{{#FFF 이름}}} ||<(>Carl-Heinrich von Stülpnagel[br]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666> {{{#FFF 출생}}} ||<(>[[1886년]] [[1월 2일]][br]{{{-1 [[독일 제국]] [[베를린]]}}} || ||<#666> {{{#FFF 사망}}} ||<(>[[1944년]] [[8월 30일]][br]{{{-1 [[나치 독일]] [[베를린]]}}} || ||<#666> {{{#FFF 최종 계급}}} ||<(>[[파일:Si_4b.png|width=32]] [[육군]] 보병 대장 || ||<#666> {{{#FFF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666> {{{#FFF 주요 서훈}}} ||<(>기사십자 철십자장|| [목차] [clearfix] == 개요 ==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Karl-Heinrich von Stülpnagel)은 독일 제3제국의 보병대장이자, 히틀러에 대한 암살을 꾀한 인물이다. == 생애 == 프로이센 [[융커]] 가문 태생으로 아버지 헤르만 폰 슈튈프나겔은 [[독일 제국군]] 중장이었고, 친척 오토 폰 슈튈프나겔 또한 [[독일 국방군]] 육군 장군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초급장교로 참전, 종전 시 육군 대위였으며 [[철십자 훈장]]을 2회 수훈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군에 남았으며 1937년에는 육군 중장으로 육군참모차장을 지냈고 1939년 4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 [[바르바로사 작전]] == 제17군을 지휘하여 [[키예프 전투(1941년)|키예프 전투]] 등의 승전에 기여했다. 이후에는 프랑스로 이동하여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오토 폰 슈튈프나겔 보병대장의 후임으로 [[프랑스 군정청]]의 프랑스 주둔군 사령관(Militärbefehlshaber in Frankreich)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 1944년 7월 20일 == 이미 패색이 조금씩 짙어져 가는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하라는 압력을 받은 슈튈프나겔은 [[슈바르체 카펠레]]와 연합하여 총통의 암살을 꾀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슈바르체 카펠레 단원들이 베를린에서 [[발키리 작전]]을 발동함과 동시에,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에 있던 슈튈프나겔도 자기 휘하 병력에게 파리의 SS와 게슈타포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파리에 있던 서부전선 해군 사령관 해군대장 테오도어 크란케(Theodor Krancke) 제독이 이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예하의 해군 병력 1천여명을 [[해군 육전대|육전대]]로 동원하겠다며 대치했고, 보다못한 주 파리 대사의 중재로 슈튈프나겔 장군은 반란을 포기했다. 슈튈프나겔 장군은 "오해였다"며 상황을 무마한 뒤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해군과 SS 지휘관들과 [[건배]]를 하며 훈훈한 분위기로 헤어졌다. 그 뒤 슈튈프나겔 장군은 베를린에서의 거사 실패 소식을 접하고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한쪽 눈만 실명한채로 자살에 실패했고, 이후 체포되어 8월 30일에 처형되었다. == 전범 행위 == 슈튈프나겔은 [[프랑스 군정청|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그 곳 유대인의 추방이나 레지스탕스 학살, [[아인자츠그루펜]]과의 협력 등의 전범 혐의에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