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003400 0%,#003400 30%, #003400 70%, #003400)" '''{{{#fff {{{+1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br]和宮親子内親王}}}'''}}}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lib.city.minato.tokyo.jp/114kazunomiya.jpg|width=100%]] {{{-2 ▲ 코우치기를 입은 카즈노미야.}}} [[파일:external/www.tsukudo.jp/kazunomiya2.jpg|width=100%]] {{{-2 ▲ [[우키요에]](浮世繪)로 그려진 카즈노미야.}}}}}} || ||<|2> '''{{{#fff 출생}}}''' ||[[1846년]] [[7월 3일]] || ||[[야마시로|야마시로국]] [[교토]] 하시모토 별저[br](現 [[교토부]] [[교토시]]) || ||<|2> '''{{{#fff 사망}}}''' ||[[1877년]] [[9월 2일]] (향년 31세) || ||[[일본 제국]] [[하코네]] 하코네 온천 (現 [[일본]] [[하코네마치]] 하코네 온천) || || '''{{{#fff 신체}}}''' ||143.4cm, 34kg, [[A형]]~[[AB형]][* [[https://ja.wikipedia.org/wiki/和宮親子内親王#遺体と副葬品|출처]] 유골 조사 결과 나온 키하고 몸무게 및 혈액형이다.] || || '''{{{#fff 배우자}}}''' ||[[에도 막부]]의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br](德川家茂, 1846년 - 1866년)의 정실(正室) || [목차] [clearfix] == 개요 == [[에도 막부]] 말기에 살았던 [[일본]]의 황족, [[공주]]. [[닌코 덴노]]의 [[유복녀]]이자 막내딸이며, [[에도 막부]] 1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정실부인이다. 이에모치와의 [[결혼]]은 어찌보면 [[귀천상혼]]이라 당시 일본 역사 희대의 사건이었으며, 이는 두고두고 일본의 여러 [[사극]]에서 소재로 사용되어왔다. 드라마 [[오오쿠]]에서의 배우는 [[미소라 히바리]](1968년판), 아다치 유미[*2003년판 역사와는 다르게, 작중에서는 활발함과 동시에 쿨시크한 모습을 보여준다. 첫 약혼자인 타루히토 친왕을 "말 많은 수다쟁이"라고 디스하고, [[도쿠가와 이에모치]]와의 혼인에 응한 이유도 '''초상화에 그려진 얼굴이 잘생겨서'''(...) 게다가 이에모치의 생모, 즉 [[시어머니]]뻘인 짓세인의 말을 초면부터 쿨하게 씹어버리는 동시에 짓세인이 하는 말마다 또박또박 받아치는 패기를 보여준다(...)], <[[아츠히메(드라마)|아츠히메]]>에서는 [[호리키타 마키]], [[청천을 찔러라]]에서는 [[후카가와 마이]]가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 역을 맡았다. == 생애 == === 유년기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mperor_Nink%C5%8D.jpg|width=350]] 카즈노미야 치카코의 아버지 [[닌코 덴노]]. 1846년 [[7월 3일]](코우카(弘化) 3년) 야마시로 국[*山城國 8세기 [[간무 덴노]]의 헤이안 천도 후 [[메이지]] 시대까지 [[교토고쇼]](京都御所)가 있었던 [[일본]]의 구니, 현재의 [[교토]] 남부.]의 고쇼[* [[천황]]과 그의 가족들의 거처이다.] 동쪽에 위치한 하시모토 별저(橋本別邸)에서 일본의 120대 [[천황]]인 [[닌코 덴노]]와 그의 측실 하시모토 쓰네코[*橋本經子 [[1826년]] 곤다이나곤(權大納言) 쿠게(公家) 하시모토 사네히사(橋本實久)의 딸로 태어났다. [[닌코 덴노]]가 사망한 후 칸교인(觀行院)이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했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즈노미야가 태어났을 당시 [[닌코 덴노]]가 이미 사망하였고 어머니가 [[첩]]이었기 때문에, 카즈노미야는 외가에서 [[유모]]의 손에 자랐다.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이다. 따라서 [[고메이 덴노]]의 아들인 [[메이지 덴노]]의 [[고모]]가 된다. [[고메이 덴노]]는 즉위한 후에 1살의 여동생에게 '카즈노미야'(和宮)라는 칭호를 부여하였고, 카즈노미야가 15살이 된 [[1861년]]에는 정식으로 '치카코(親子)'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의 혼약 === 카즈노미야가 태어났을 때에는 일본은 개국으로 혼란한 시대였다. 7살이 되는 [[1853년]] [[흑선내항]]사건이 일어났고, 다음해는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국을 했다. [[1858년]]에는 [[에도 막부]]는 미국에 떠밀려 [[천황]]의 허락을 받지 않고 불평등조약인 [[미일수호통상조약]](米日修好通商条約)을 체결한다. 일본은 [[에도 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래로 [[네덜란드]] 외에는 각 지방의 번들이 서양국가와 교역을 금지하는 쇄국 정책을 고수하여 유지해 왔다. 이 사실은 외국을 싫어하기로 유명한 [[고메이 덴노]]의 심기를 건드렸고, 미일수호통상조약으로 일본은 막대한 경제적 불이익을 가져왔고, 이런 막부에 불만을 가진 [[존황양이]] 세력이 커져가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막부와 황실의 대립관계를 풀자는 움직임이 일었는데, 그것이 바로 1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와의 결혼 추진이었다. 만약 둘의 결혼이 성사된다면 이는 공무합체(公武合體)로, 황실과 막부가 결혼을 통해 화합을 노려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이는 일본 역사에 얼마 없는 귀천상혼으로 일본 역사의 새로운 한 획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 황실]] 측에서는 이를 반대하였고, 카즈노미야의 상대로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 1835년 - 1895년, [[일본 황실]]의 [[미야케]] 중 하나인 [[아리스가와노미야]]의 9대 당주. 8대 당주였던 타카히토 친왕(幟仁親王)~~둘다 '치인친왕'~~의 [[장남]]이다. 이 때의 파혼의 원한으로 [[메이지유신]]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공으로 의회 원로원 의장, 일본 [[적십자]] 초대 총재 등을 지냈다.[br] [[파일:external/www.sakai.zaq.ne.jp/img490.jpg]]]을 골라 두 사람의 정혼을 이미 확정한 상태였다. 이때 막부는 꾀를 쓴다. 바로 [[고메이 덴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에도 막부]]는 천황에게 '몇 개월 내에 쇄국 정책을 다시 펼치겠다' 라는 조건으로 이에모치와의 결혼 승낙을 얻어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카즈노미야가 이에모치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막부의 쇄국 정책 복귀 선언은 조약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고메이 덴노]]에게는 한줄기 빛과도 같았기에, 막부의 결혼 요청을 이제 와서 다시 반대할 수는 없었다. 다시 반대한다면 변덕이 심하다고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우려에, 그는 결혼하기 싫어하는 카즈노미야를 결혼시키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궁리해낸다. >'''카즈노미야가 결혼을 거부한다면, 대신 짐의 황녀를 이에모치와 결혼시킨다. 그리고 카즈노미야는 [[절(불교)|절]]에 출가[* [[고메이 덴노]]는 막부가 쇄국정책 약속을 하였을 때 카즈노미야가 이에모치와의 결혼을 눈치채기 전에 이미 타루히토 친왕과의 결혼을 파기했으며, 이 때문에 카즈노미야는 이에모치와도, 타루히토 친왕과도 결혼을 하지 않게 되어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에, 당시 결혼을 하지 않는 일본의 귀족이 [[불교]]에 귀의하는 규범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시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삼촌과 어머니가 이에모치와 결혼하라는 [[천황]]의 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자,[* 아무리 당시 [[천황]]이 힘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 실무에 한정된 일일 뿐이고, 그 당시도 [[천황]]은 신과 같은 존재였기에 그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으로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무거운 죄였다.] 카즈노미야는 고심 끝에 마침내 마음을 열었다. 단 그에는 여러가지 조건이 달렸다. 아버지 [[닌코 덴노]]의 기일에 [[교토]]에 가게 해 줄 것, 에도에서도 황실과 같은 생활을 하게 해 줄 것, 자신의 휘하 [[시녀]]들을 같이 데리고 가게 해 줄 것 등. [[고메이 덴노]]도 여동생의 요구를 들어주라 하고, 카즈노미야를 [[에도 막부]]에 시집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에도 막부]]가 카즈노미야를 인질로 삼아 [[천황]]을 제위에서 끌어내리려 한다!' 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고메이 덴노]]는 이를 듣고 카즈노미야의 경호를 한층 더 강화시키라고 명했다. 1861년, 15살이 된 카즈노미야는 '치카코'라는 이름을 받고, 동년 [[10월 20일]]에 [[교토 고쇼]]를 떠나 [[에도 막부]]가 있는 [[에도 성]]으로 향했다. 이때 카즈노미야의 행렬은 장장 50km에 달했으며, 수행원까지 포함하면 총 3만여명에 달했다. [[고메이 덴노]]는 일부 반대파들의 습격을 우려해 본래 [[교토]]와 [[에도]] 간 주요 도로였던 도카이도도(東海道) 대신 위쪽 산간 지방을 지나는 나카센도(中山道)로 이동하게 했다. 카즈노미야 행렬이 지나갈 때 도로변의 상점은 임시 폐쇄되었으며, [[고양이]] 우는 소리도 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카즈노미야는 1달 후인 [[11월 15일]] 에도의 시미즈(淸水) 저택에 들어간다. 이로써 공무합체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듯 싶었으나… ===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 === 초반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고메이 덴노]]가 에도로 보낸 사신이 돌아왔는데, 그는 카즈노미야의 에도 생활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서신을 들고 왔다. 그러나 그 서신에는 카즈노미야와 고메이 덴노의 요구사항과는 정 반대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예를 들어 기일에 [[교토]]로 갈 수 있게 해달라 했는데 사정으로 인해 연기가 계속되었다고 하고, 황궁과 같은 생활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시어머니라 할 수 있는 [[텐쇼인]]의 대우, [[오오쿠]] 내의 여성들과의 불화가 계속되었다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카즈노미야는 강가할 때 휘하 [[궁녀]]들을 막부에 데리고 왔는데, 무사 가문의 여식들이 대부분이었던 [[오오쿠]]의 [[시녀]]들과 [[교토]]의 공가(公家) 귀족 여식들과 부인들인 [[궁녀]]들의 사이는 '''물과 기름 급'''으로 나빠서, 가치관과 자존심, 상관 문제 등의 마찰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메이 덴노는 '여자가 처음 시집가면 으레 있는 일이다.' 라고 생각하여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 와중에 이에모치와 카즈노미야는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 이것이 바로 일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카즈노미야의 강가(和宮降嫁)'이다. 이 결혼은 이때까지의 [[쇼군]]들의 결혼과는 사뭇 달랐다. [[에도 성]] [[오오쿠]]에서는 [[쇼군]]의 정실을 미다이도코로(御台所)라고 불렀고, 본래 미다이도코로는 공가나 무가의 여식이나 방계 황족 중에서 뽑았는데 평소에는 쇼군에 비하면 한 끗발 밀리는 위치였으나, 이번에는 아내 쪽의 격이 더 높았다. 비록 서녀이긴 했지만 카즈노미야는 덴노의 친딸인 공주였기 때문에, 남편될 이에모치보다 격이 높은 신분이였다.[* 애초에 황가/공가와 무가는 같은 범주가 아니라 신분차를 비교하기 애매했다.]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카즈노미야가 남편 이에모치보다 상석에 앉았다. 한편 [[막부]]가 카즈노미야의 결혼 조건으로 단 '몇 개월 안의 양이(쇄국 정책) 전환'이 실현되지 않자, [[막부]]에 반대하는 반대파가 늘어났으며, [[고메이 덴노]]의 친정을 기대하는 세력이 급증했다([[존왕양이]]). [[교토]]에서도 여러 번 에도에 양이를 독촉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지만 [[막부]]측은 그때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계속 미루었다.[* 한번은 이에모치가 병에 걸려 아예 사신들과 대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 독촉이 이어지자, 이에모치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설명하려 [[교토]]로 가게 된다. [[텐쇼인]]과 그 외 [[오오쿠]]의 여성들과 달리, 이에모치와 카즈노미야의 사이는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갑내기였기에 빠르게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카즈노미야는 이에모치가 내정 때문에 [[교토]]로 가게 되자, 그의 무사귀환과 건강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이에모치는 교토에 도착해서 처남 [[고메이 덴노]]를 알현했으며, 황실의 공식 행사에 여러 번 참여했다. 한번은 [[고메이 덴노]]가 양이에 관한 말을 이에모치에게 하려 했으나, 이에모치는 독감을 핑계로 대답을 피하는 꾀를 썼다고 한다. 이 즈음, 강력한 [[존왕양이]]를 표명했던 [[조슈 번]]이 교토 황궁을 습격하는 [[금문의 변]][*禁門の変 [[조슈 번]]의 일부 양이 세력이 [[막부]]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품고 교토로 쳐들어와 [[막부]]파와 황궁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던 사건]이 일어난다. 에도로 돌아온 이에모치는 이를 듣고 [[조슈]] 정벌을 선포한다. 1865년, 이에모치는 막부의 군사들을 이끌고 조슈를 향해서 출병한다. 이때 카즈노미야는 이에모치의 위업 달성과 무사 귀환을 빌며 그를 배웅했는데,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 [[텐쇼인]]과의 관계 ==== [[파일:external/i1043.photobucket.com/tenshoin1.jpg]] 카즈노미야의 [[시어머니]]뻘 되는,[* 톈쇼인은 이에모치의 생모가 아니다. 이에모치의 생모는 지츠죠인/짓세인(実成院)으로, 워낙 화려한 것과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매일 저녁 [[오오쿠]] 내 [[시녀]]들과 연회를 벌였던 것을 당시 오토시요리(총책임자)였던 타키야마가 지적했다는 얘기가 있다.] [[텐쇼인]][* 이에모치의 사촌형인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 이에사다는 이에모치를 후계자로 정하면서 그를 양자로 삼았기에 동시에 양아버지가 된다. 즉 그의 아내인 텐쇼인 역시 양어머니에 해당하게 된다.] 상술했듯 애초에 신분도 다르고 가치관도 달라 많은 불화를 겪었으나, 차후에는 화해했다. 본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와의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지만,[* 요시누부는 이에모치와 쇼군 자리를 두고 경쟁한 사이이며 이에모치 대신 실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에도 막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카즈노미야는 [[텐쇼인]]과 함께 [[막부]]를 응징하려는 사쓰마 군에 요시노부의 구명(求命)을 탄원했다. === 이에모치의 죽음과 그 이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Kazunomiya.jpg]] 이에모치 사후의 카즈노미야. 이때 열강들이 몰려와 [[효고]]를 개항하라 압력을 넣자, [[고메이 덴노]]는 어쩔 수 없이 서양 세력을 받아들이게 된다. 카즈노미야는 이에 대해 '양이를 조건으로 여기에 시집왔는데, 이렇게 되면 내가 시집온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고메이 덴노]]에게 개항의 반대의지를 표명했다. 한편 조슈 정벌 중이던 이에모치는 격전지인 [[오사카]]의 [[오사카 성]]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1866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즈노미야는 에도의 절에 남편의 쾌유를 빌게 하고, 의원을 오사카로 급파했다. 이러한 카즈노미야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에모치는 동년 [[7월 20일]]에 [[오사카 성]]에서 사망한다. 카즈노미야는 불과 20살에 과부가 된 것이다. 차기 [[쇼군]]은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해 모두의 관심이 쏠렸는데, 이에모치의 유언과는 달리 카즈노미야와 [[막부]]의 여러 대신들은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를 차기 [[쇼군]]으로 세우기로 하고, 이에모치가 후계자로 지목한 도쿠가와 이에사토(德川家達)는 그의 후계자로 세우기로 했다.[* 이는 요시노부와 이에사토의 나이 차이가 거의 30세에 달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이 나온 것이다.]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자, 카즈노미야는 요시노부에게 여러 번 양이로 돌아서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이를 계속 거부했다. 동년 [[12월 9일]]에는 이에모치가 사망했기 때문에 카즈노미야도 세이칸인(靜寬院)이라는 [[법명]](法名)을 받았다. 그러나 카즈노미야는 막부로 시집온 이후에도 황족으로서의 자존심이 남아있었기에, 법명 뒤에 '미야([[宮]])'를 붙여 '세이칸인노미야' 라고 칭했다. ~~명불허전 황족~~ 그리고 [[1867년]] [[1월 30일]]에는 [[고메이 덴노]]가 사망했다. 또한 어머니 칸교인이 그즈음에 사망했다. 카즈노미야는 어머니, 남편, 오빠를 거의 한꺼번에 모두 잃은 것이다. [[고메이 덴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메이지 덴노]]가 즉위하였다. [[메이지 덴노]]는 조정의 주요 인사를 모두 갈아치웠으며, [[막부]]와 대립했다. 그렇기에 [[막부]]에 시집간 [[고모]] 카즈노미야를 다시 교토로 불러오길 원했다. 카즈노미야는 이때도 여전히 양이를 주장했다. 여러 세력이 [[천황]]파가 되면서 [[막부]]의 존립 위기가 닥치자,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미끼로 [[막부]]를 계속 유지하려 들었다. [[천황]]은 [[막부]]에 통치권과 영지(領地) 등을 모두 반납하라 명했지만, 요시노부는 거부하고 황실군과 [[막부]]군이 도바-후시미 전투, 보신 전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요시노부는 이 전투에서 패했다. 그러나 [[막부]]의 여러 대신들은 끝까지 싸우자 했고, 요시노부는 반대였다. 그는 마음을 누그러뜨려 [[천황]]에 복종(항복)하기로 마음을 정했으며, 카즈노미야에게도 이 사실을 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부]]를 다시 한 번 공격하자는 의견이 거셌으며, 이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成)등에 의해 강력히 추진되었다. 이때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군대의 총사령관은 어이없게도 카즈노미야의 원래 결혼 예정 상대였던 타루히토 친왕이었다.(또한 타루히토 친왕의 전처는 도쿠가와 집안의 딸이었다)~~옛날의 동지가 지금의 적~~ ~~결혼 못하고 그냥 [[화족]]과 결혼한 게 불만이었나?~~ ~~근데 부인이 적군 집안 출신이라는 것도 함정~~ 이런저런으로 [[막부]]의 존립 위기가 커져가는 상황에서, 조정의 대신들 중 [[이와쿠라 도모미]](岩倉俱見)와 같은 막부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몇몇 인사들이 막부 응징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담을 하여 몇몇 조건[* [[에도 성]]을 개방하고 [[막부]] 군대의 무장 해제 등.]하에 요시노부를 구하려 했다. 이는 다행히도~~?~~ 성공하여 요시노부는 이를 듣고 바로 [[에도 성]]을 개방했고 이에 따라 막부 정벌군은 에도 성에 무혈입성한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천황]]의 군대에 저항하려는 몇몇 대신들이 아직도 [[막부]] 내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카즈노미야가 발벗고 나섰다. 카즈노미야는 그들에게 >"지금은 저항하지 않고 복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천황]]께 충성하는 것은 도쿠가와 가문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비교적 낮은 신분이었던 [[텐쇼인]]이 중심이 되는 적지 않은 일본 사극들에서는 텐쇼인의 아이디어라고 포장되는데, 사실이 아니다.] 카즈노미야의 이러한 뜻에 조정도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요시노부와 도쿠가와 가문을 살려두기로 정한다. 이에 대해 카즈노미야는 감사의 뜻을 조정에 보냈다. 이로써 도쿠가와 가문은 완전히 [[천황]]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요시노부는 조정으로부터 [[공작(작위)|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요시노부에 밀려 [[쇼군]]이 되지 못하고 그의 후계자로 전락한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대신 도쿠가와 가문 종가(宗家)의 당주로 임명되었다. === 말년 === 혼란스러운 사회상에 잠시 묻혀진 카즈노미야의 [[교토]]행은 다시 언급되었다. 조정에서 카즈노미야를 교토로 데려오려 했으나, 카즈노미야는 "물론 아버지([[닌코 덴노]])의 능을 참배하는 등 교토행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아직 시가(도쿠가와 가문)가 안정되지 않았고, 에도 사람들의 정서를 감안했을 때, 아직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1869년]], 카즈노미야는 마침내 [[교토]]로 향한다. 교토에 도착한 카즈노미야는 조카 [[메이지 덴노]]와 만나고, 1년간 교토에서 체류하다가 1870년, 아버지의 능을 참배한다. 카즈노미야는 그 후 에도([[도쿄]]) 천도를 함에 따라 [[메이지 덴노]]를 따라 다시 에도로 향하였으며, 에도에서 도쿠가와 가문의 사람들과 자주 접하며 교류를 쌓았다. === 죽음 === 카즈노미야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약한 몸이었다. 남편 이에모치는 평소 단 것을 워낙에 좋아해 [[충치]]가 심했고, [[각기병]]에 시달리다 젊은 나이에 사망했는데[* [[각기병]]은 [[비타민 B1]]의 결핍으로 생기는 [[비타민]]결핍증으로, 단 것을 즐겨 먹으면 비타민 B1이 부족해질 수 있다.] 카즈노미야는 점차 남편의 식성을 따라갔으므로 역시 [[각기병]]에 걸렸다.[* 각기병 말고도 왼손이 부자연스러웠다고 한다. 뚜렷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 병에 걸려 쇠약해진 몸을 조리하러 카즈노미야는 [[하코네]] [[온천]]에서 요양을 하게 된다. 그러나 거처를 하코네로 옮긴 지 1달 만에 카즈노미야는 32세 나이로 사망한다. 남편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므로 그에 따라 [[도쿄도]] [[미나토구(도쿄)|미나토구]]의 이에모치 묘 옆에 묻혔다.[* 여담으로 카즈노미야와 이에모치 내외의 무덤 옆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정실 [[스겐인]]도 같이 묻혀져있는데, 히데타다 부부의 경우 동시에 합장이 되어있는 반면 [[도쿠가와 이에모치|이에모치]]와 카즈노미야는 무덤이 각각 따로 조성되어있다. 그만큼 황녀로서의 지위가 높아서 무덤도 따로 조성된 걸로 추측된다.] [[분류:일본의 내친왕]][[분류:1846년 출생]][[분류:1877년 사망]][[분류:에도 시대/인물]][[분류:하코네정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