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1차세계대전기의 독일 제국군 장성급 장교)] [include(틀:역대 벨기에 총독)] |||| '''{{{#fff 독일 제국군 육군 원수[br]{{{+1 콜마르 폰 데어 골츠}}}[br]Colmar von der Goltz}}}'''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Goltz-portrait.jpg|width=100%]]}}} || ||<#666> {{{#FFF 이름}}} ||<(>'''Wilhelm Leopold Colmar Freiherr von der Goltz'''[br]빌헬름 레오폴트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남작[*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데어골츠'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 ||<#666> {{{#FFF 국적}}} ||<(> [include(틀:국기, 국명=독일 제국)] ([include(틀:국기, 국명=프로이센 왕국)]) | [include(틀:국기, 국명=오스만 제국)] || ||<|2><#666> {{{#FFF 출생}}} ||<(>[[1843년]] [[9월 13일]] || ||[[프로이센 왕국]] 아들리그비엘켄펠드[* 현 [[러시아 연방]] [[칼리닌그라드 주]] 이바노프바] || ||<|2><#666> {{{#FFF 사망}}} ||<(>[[1916년]] [[4월 19일]] (향년 72세) || ||[[오스만 제국]] [[바그다드]] || ||<#666> {{{#FFF 복무}}} ||<(>[[독일 제국군]] (1861 ~ 1911년, 1914 ~ 1916년) || ||<#666> {{{#FFF 최종 계급}}} ||<(>육군 원수 || ||<#666> {{{#FFF 주요 참전}}} ||<(>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br][[보오전쟁]][br][[보불전쟁]][br][[제1차 세계 대전]] || ||<#666> {{{#FFF 주요 서훈}}} ||<(>[[푸르 르 메리트]] 민사훈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콜마르 폰 데어 골츠는 [[독일 제국군]]의 군인이자, 오스만 제국군의 군인이기도 하다. 최종계급은 원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벨기에 총독으로 [[벨기에 학살]]에 한 몫 하였다. == 생애 == === 초기 === 콜마르 폰 데어 골츠는 1843년, 동프로이센에서 명문가 골츠 가문[* [[뤼디거 폰 데어 골츠]]가 같은 가문 출신이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61년 [[프로이센군|프로이센 왕국군]]에 입대하였다. 골츠는 소위로 임관되어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 참전하였다. 골츠는 그곳에서 [[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을 만났고, 토른[* 현 [[폴란드]] [[토룬]].] 근방에서 복무하였다. 이후 베를린 전쟁 대학에 입학하였고, 보오전쟁에 참전하였다. 트라우타우 전투에 참여하여 부상을 입었으며, 지형 세션으로 장군참모 과정을 밟았다. 보불전쟁에서 골츠는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 휘하의 2군단에 배치되었다. 마르스 라 루트, [[그라블로트 전투]]와 [[메스로의 행진]]에 참여하였다. 이후 골츠는 대위로 승진과 함께 포츠담에 있는 전쟁학교의 역사 섹션의 교수직에 역임하였다. 그가 겪었던 전쟁들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군관련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이후에도 작가로서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 오스만 제국에서 === [[러시아-튀르크 전쟁|오스만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게 대패]]하였을 때, 골츠는 오스만 제국군의 강화를 위해 [[오스만 제국]]에 파견되었다. 골츠는 오스만 제국군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들을 혁신했다. 이 공로로 골츠는 파샤 칭호를 받았으며 1911년에는 원수로 진급하였다. 전역한 이후에도 [[푸르 르 메리트]] 민사훈장을 받는 등 큰 명예를 누렸다. === [[제1차 세계 대전]] ===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골츠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벨기에 침공]]으로 수립된 [[벨기에 총독부]]의 총독이 되어 [[벨기에 학살]]에 조력하였고, 이를 정당화했다. 골츠의 이러한 행적은 훗날 [[아돌프 히틀러]]에게서 칭찬받았다. 골츠는 이후 벨기에 총독부 자리에서 물러나고, [[오토 리만 폰 잔더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다시 배치되었다. [[메흐메트 5세]]는 너무나도 무능한 칼리파였고, 실권자였던 [[이스마일 엔베르]]는 골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츠는 영국군으로부터 오스만 제국을 지켜냈다. 골츠는 이후 이스마일 엔베르의 명령을 따라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후 골츠는 1916년, 발진으로 인해 죽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발진이다. 여담으로 골츠가 죽은 집에서 19개월 후 영국의 중장 [[프레드릭 스탠리 머드]]가 죽었다. [[분류:독일의 남작]][[분류:파샤]][[분류:1843년 출생]][[분류:1916년 사망]][[분류:칼리닌그라드 주 출신 인물]][[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의 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