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델리 술탄)] [목차] == 개요 == [[우르두어]]: {{{+1 قطب الدین مبارک شاہ }}} [[힌디어]]: अलाउद्दीन खिलजी [[영어]] Qutbuddin Mubarak Shah 재위 1316년 4월 14일 ~ 1320년 7월 9일 생몰 1298년? ~ 1320년 7월 9일 [[델리 술탄국]]의 15대 술탄. [[알라 웃 딘 할지]]의 장남으로, 부왕의 사후 동생 쉬하붓딘 오마르를 옹립한 권신 말리크 카푸르에 의해 감금되었으나 근위대의 정변으로 풀려나 섭정이 되었다. 얼마 후 쿠트붓딘은 쉬하붓딘을 폐위한 후 직접 술탄에 올랐고, 부친 알라웃딘의 엄격한 정책들을 폐기 혹은 완화하여 여론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다. 알라웃딘 사후 벌어진 여러 반란에 대해 쿠트붓딘은 우선 [[구자라트]]를 평정한 후, 1317년 데바기리와 1318년 와랑갈을 점령하여 [[야다바 왕조]]와 [[카카티야 왕조]]를 각각 멸망 / 재복속시키고 중남부 인도를 평정하였다. 이로써 델리술탄국은 인도 대륙의 2/3 가량을 지배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쿠트붓딘은 양성애자였는데, 점차 구자라트 출신의 동성애인 하산 (쿠스라우 칸)에게 빠져들게 되었고, 그가 동향 출신의 바라두 힌두교도 용병대를 모아 델리로 데려오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1320년 하산은 바라두 부대와 함께 쿠트붓딘을 살해하며 술탄에 올랐고, 이로써 할지 왕조는 4대 만에 멸망하였다. 다만 같은해 펀잡에서 [[차가타이 칸국]]을 견제하던 튀르크계 장군 투글루크가 봉기하여 하산을 제거하고 술탄에 올라 [[투글루크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 생애 == 말리크 카푸르의 죽음 후 귀족들이 나입-이-물크 (섭정)에 오를 것을 권하자 쿠트붓딘은 위험한 자리라 여겨 이를 거절하고, 모친과 함께 국외로 떠나려 하였다. 하지만 대신들의 거듭된 설득에 결국 섭정에 오른 쿠트붓딘은 몇주 후 쉬하붓딘의 모친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동생을 폐위, 실명시킨 후 변경 지역인 [[괄리오르]]로 유배시켰다. 1316년 쿠트붓딘은 17-18세의 나이로 술탄이 되었고, 쉬하붓딘은 같은해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즉위 후 논공행상에서 쿠트붓딘은 기존 귀족들에게 요직을 나눠준 것에 반해, 말리크 카푸르를 살해한 근위대 (파이크) 장교들이 직위를 요구하자 모두 처형하였다. 새로이 요직에 임명된 소수의 인물 중에는 가지 말리크 투글루크의 아들 말리크 파크룻딘 주나와 쿠트붓딘의 노예 겸 동성애인이던 하산이 있었다. 내정에 있어 쿠트붓딘은 부왕 알라웃딘의 엄격한 모습과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우선 알라웃딘이 부패 등의 다양한 이유로 감금한 1만 8천의 관리들이 전원 석방되었고, 정부 차원에서 몰수한 개인 사유지 역시 반환하였다. 또한 지나친 과세 및 미납자에 대한 과도한 형벌을 금했으며, 부왕이 말년에 금지한 공중 청원도 부활시켰다. 다만 기존의 곡물 등 필수품에 대한 물가 상한제의 폐지는 ([[물탄]] 상인들의 독점에 의한)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그외에 검소했던 알라웃딘과 달리 쿠트붓딘은 병사들의 봉급을 올려주고 6개월치 월급을 일시 지급하는 등의 후한 못브을 보였다. 비록 음주와 도박, 매춘 등에 대한 제한 정책은 유지되긴 했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델리는 곧 환락의 도시가 되었다. 쿠트붓딘 본인 역시 델리 북쪽의 하자르 술탄 궁전에서 사치와 향락을 과시하였다. 쿠트붓딘이 부친과 닮은 몇 안되는 장점은 군사적 능력이었다. 대규모 정복을 이룬 알라웃딘이 10년도 안되어 사망하자 인도 각지에서 반란이 벌어졌다. [[분류:델리 술탄]][[분류:131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