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튀르키예의 세계유산)] [[파일:Xanthos_Roman_Theatre_2019.jpg]] 로마식 극장 [[파일:xanthos-ancient-kalkan-rentals-5.jpg]] 바실리카 및 모자이크 유적 ||<-3> [[유네스코|{{{#fff '''유네스코'''}}}]] [[세계유산|{{{#fff '''세계유산'''}}}]] || ||<-3>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160]] || ||<|2> 이름 || 한국어 || 크산토스-레툰 || || 영어, 불어 || Xanthos-Letoon || |||| 국가·위치 || [[튀르키예]] [[무을라]], [[안탈리아]] 도 || ||<-3> [include(틀:지도,장소=Xanthos, 너비=100%, 높이=224px)] || |||| 등재유형 || [[세계유산#s-3.1|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8년]] || |||| 등재기준 || (ii)[* ], (iii)[*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 지정번호 || [[http://whc.unesco.org/en/list/484|484]] || [목차] == 개요 == [[터키어]] Ksantos 리키아어 𐊀𐊕𐊑𐊏𐊀 [[그리스어]] Ξάνθος [[라틴어]] Xanthus [[영어]] Xanthos [[튀르키예]] 남서부의 고대 도시. 크산토스, 아르나로도 알려져 있다. [[페티예]] 동남쪽, 에셴 강 하류 동안의 언덕에 위치한다. 지명은 [[그리스 신화]]에서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끌던 신마 크산토스에서 유래되었다. 과거 [[리키아]] 지방의 중심 도시로, 고대 시기 번영했으나 중세의 전한으로 버려졌다. 1988년 인근의 종교 도시 레툰 (레토)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고대 로마식 극장, 동로마 시기 바실리카 유적 등이 남아있다. [[영국박물관]]에 전시 중인 아르비나스, 파야바 영묘 역시 여기서 출토된 것이다. == 역사 == [[파일:Xanthos-Antik-kenti-1-1067x650.jpg]] 유적 전반부 [[파일:Lycian_tombs_Xanthos_IMGP8884.jpg]] 인근 산지의 절벽 무덤 기원전 8세기 경에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기원전 540년, [[하르파고스]]가 북쪽의 평지에서 리키아 군을 격파하고 패잔병들이 철수한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했다 한다. 패색이 짙어지자 리키아 병사들은 성채를 파괴, 처자식 및 노예들을 죽인 후 페르시아 군에 최후의 돌격을 하여 전멸했다고 전한다.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의 번국이 들어섰고, 기원전 516년 크산토스는 [[다리우스 1세]]의 조공 목록에서 첫 순서에 기록되었다. ||[[파일:Xanthian_Obelisk_2019.jpg|width=330]]||[[파일:Official_receiving_Visitor_Xanthos,_Nereid_Monument,_Frieze_II,_Block_879.jpg|width=570]]|| || 리키아 문자로 새겨진 크산토스 오벨리스크 ||아르비나스 (에르빈나) 왕의 부조|| [[알렉산드로스 3세]]가 테멜레소스 (페티예)에서 남하하자 리키아 연맹의 도시들은 항복했고, 알렉산드로스는 크산토스 강가에서 그리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파괴할 것이라는 예언이 적힌 동판을 발견했다. [[디아도코이]] 시기 일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령이 되었다가, 기원전 1세기 [[로마 제국]]령 리키아 속주에 편성되었다. 기원전 42년,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가 리키아로 와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맞설 자금 마련에 나섰다. 리키아 연맹이 납부를 거부하자, 브루투스는 크산토스를 포위해 함락하였다. 이번에도 수비대는 성채에 방화하였고, 150명만이 살아남았다 전한다. 도시는 이듬해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를 격파한 안토니우스에 의해 재건되었다. 로마식 사각꼴 도시로 재건된 크산토스에는 서쪽에 회랑을 갖춘 넓은 광장이 들어섰고, 3중 회랑을 갖춘 바실리카도 세워졌다. 아크로폴리스에는 고급 저택들이 들어섰다. 역사가 [[스트라보]]는 리키아의 최대 도시로 묘사했다. 3세기 들어 기독교가 전래되며 크산토스에는 대성당으로 전환된 바실리카를 포함해 여러 교회가 세워졌고, 크산투폴리스 주교구가 설치되었다. 6세기 무렵 대지진으로 건물 다수가 파괴되었지만, 곧 재건되었다. 7-8세기 들어 크산토스는 아랍 세력의 침공에 맞서 요새화되었지만, 11세기 무렵 파괴되어 버려졌다. == 발굴 == [[파일:xan_pjt.jpg]] 1838년 영국의 찰스 펠로우스 경이 발굴하여 리키아 석관 등의 유물들을 영국으로 이송, 현재 [[영국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1950년대부터는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 아르비나스 영묘 === [[파일:Reconstruction_Nereid_Monument_BM.jpg]] 영국박물관에 전시된 모습 [[파일:Xanthus,_tomb_of_the_Nereids,_podium (1).jpg]] 원래 영묘의 기단부 네레이드 기념물로도 불리며, 기원전 390년경 리키아의 군주 아르나스 (에르빈나)의 무덤으로 세워졌다. [[키루스 2세]] 무덤과 같은 [[조로아스터교]]의 기단부를 둔 영묘 양식에 그리스식 부조와 기둥을 더한 형식으로, [[마우솔로스 영묘]]의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년간 크산토스의 랜드마크로 있다가, 6세기경 지진으로 붕괴한 후 19세기 찰스 펠로우스 경이 발굴하여 영국으로 옮겼다. === 비석형 무덤 === [[파일:900eb927-8eb1-454d-ba64-48116c48d782.jpg|width=750]] 아크로폴리스의 키베르니스 (하르피) 영묘 (우)와 석관 ||[[파일:The_tomb_of_Payava,_a_Lykian_aristocrat,_about_375-360_BC,_from_Xanthos,_British_Museum_(9504934234).jpg|width=350]]||[[파일:Xanthos_Harpy_tomb_and_the_pillared_sarcophagus_7320.jpg|width=365]]|| || 영국박물관의 파야바 영묘 ||키베르니스 영묘와 미상의 석관 || * 키베르니스 (하르피) 영묘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 부상이 도져 사망한 리키아의 사트라프 키베르니스의 무덤으로 추정됨. 기워전 480년경 조성. 내부 부조들은 영국박물관에 전시 중. * 파야바 영묘 기원전 360년경 리키아의 군주 파야바의 영묘. 상부의 톱니바퀴 조각은 인도의 [[아잔타 석굴]], 로마스 리시 석굴 등지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함. [[분류:튀르키예의 유적]][[분류:튀르키예의 옛 수도]][[분류:튀르키예의 세계유산]][[분류:로마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