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고량신무왕(高涼神武王)[br]{{{+2 拓跋孤 | 탁발고}}}''' || || '''시호''' ||신무(神武) || || '''작위''' ||고량왕(高涼王) || || '''성''' ||탁발(拓跋) || || '''휘''' ||고(孤) || || '''자''' ||불명 || || '''생몰''' ||? ~ [[453년]] [[9월 13일]] || || '''출신''' ||운중군(雲中郡) 성락현(盛樂縣) || || '''부황''' ||태조 [[탁발울률|평문황제]](太祖 平文皇帝) || || '''형제자매''' ||4남 3녀 중 4남 || || '''아들''' ||탁발근(拓跋斤)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위]]의 황족. 평문제 [[탁발울률]]의 4남. == 생애 == 탁발고는 다재다능하고 모략이 뛰어났으며, 높은 포부를 품고 있었다. 광초 2년(329년)에 큰형 탁발예괴(拓跋翳槐)가 [[후조]]의 도움으로 대왕(代王)에 즉위하자, 둘째형 탁발십익건는 후조로 끌려가 양국(襄国)에서 인질 생활을 하였다. 건무 4년(338년) 11월, 대왕 탁발예괴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병사하기 직전에 여러 대인(大人)들을 불러모아 동생 탁발십익건을 후계로 지목하고 승하하였다. 탁발십익건은 먼 곳에서 인질로 잡혀있어 불러도 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여러 대인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던 가운데, 대인 양개(梁蓋)가 탁발십익건 대신 그 다음 동생을 왕으로 세우자 주장하였다. 다른 대인들도 이에 동의하여 셋째인 탁발굴(拓跋屈)이 잠시 후보로 올랐으나, 탁발굴의 성격이 사납고 굳센 것을 염려하여 금방 철회되었고, 그 대신 넷째인 탁발고를 옹립하기로 대인들끼리 합의하였다. 의논을 마친 대인들이 탁발고를 찾아가 "형 탁발굴을 죽이고 왕위를 계승하라" 권하자, 탁발고가 답했다. > "내 형님이 더 나이가 많으시니 당연히 형님께서 계승하셔야 하는데, 내가 어찌 차례를 어기고 대업을 넘겨받을 수 있겠소?" 이후 탁발고는 스스로 업(鄴)으로 달려가 탁발십익건을 봉영하고, 후조의 천왕 [[석호(후조)|석호]]를 알현해 자신이 형을 대신해 인질로 남겠다 거듭 청하였다. 석호는 탁발고의 의로움에 감탄하며 둘 모두를 대나라로 돌아가게 하였고, 덕분에 귀국하여 대왕에 오르게 된 탁발십익건은 나라의 절반을 탁발고에게 나누어 주었다. 건국 2년(339년), [[오환족]]을 복속시킨 탁발십익건이 오환족을 2부(部)로 분할하여 북부(北部)를 탁발고에게 감독케 하고, 남부(南部)를 탁발식군(拓跋寔君)에게 감독케 한 뒤, 각기 대인들을 두어 효과적으로 통제하였다. 탁발고는 얼마 뒤에 사망하였고, 훗날 도무제 [[탁발규]]가 그를 고량왕(高涼王)으로 추봉하고 시호는 '신무(神武)'라 하였다. 아들로는 탁발근이 있으나, 탁발식군과 더불어 반역하다 탁발십익건에게 제거당했다. [[분류:남북조시대/황족]][[분류:탁발선비]][[분류:후허하오터시 출신 인물]][[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