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련 문서, top1=원 간섭기, top2=여몽관계, top3=동녕총관부, top4=쌍성총관부, top5=제주특별자치도/역사)] [include(틀:탐라)] || {{{#ffffff '''원간섭기의 고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파일_원 간섭기 시기의 고려.png|width=100%]]}}} || [목차] == 개요 == 탐라총관부, 또는 탐라국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耽羅國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는 [[삼별초의 난]] 직후 [[삼별초]]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몽골 간섭기|원 간섭기]] [[정동행성]]의 하위 행정구역이다. == 역사 == [[송나라]] 토벌과 [[일본]] 토벌때부터 [[원나라]]는 [[제주도]]를 요충지로 여기고 전초기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원은 [[삼별초]]의 항쟁을 계기로 탐라를 직할령으로 삼으려고 했다. 1273년 탐라국초토사가 설치됐고, [[샹양|양양]] 전선에서 활약하던 [[실리백]](失里伯)이 탐라국초토사로 임명된다. 탐라국초토사는 곧 탐라총관부로 바뀌어 [[다루가치]]가 파견된다. [[고려사]]에서는 1273년을 다루가치가 처음 파견된 시기로 기록했다. 처음으로 확인되는 탐라국다루가치는 1275년에 파견된 손탄이고, 손탄 뒤에 실리백의 아들 [[탑랄적]]이 다루가치가 됐다. 1277년 목마장이 설치된다. 1284년, 원에 갔던 다루가치 탑자적이 돌아온다. [[원사(역사책)|원사]]에 따르면 이 해에 탐라국안무사가 설치되는데, 고려사에서는 전과 마찬가지로 제주 다루가치가 돌아왔다고 서술한다. 원사에서 '탐라국군민안무사사 다루가치'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안무사사(安撫使司)는 다루가치가 겸한 것으로 추정된다. 1294년 [[원세조]]가 죽고 [[성종(원)|성종]]이 즉위하면서 [[충렬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탐라국]]을 [[고려]]에게 돌려준다. 1300년 [[정동행성|(정동등처행)중서성]]의 청에 따라 탐라총관부가 재차 설치되자 [[충렬왕]]이 이듬해인 1301년 탐라를 다시 본국(고려)에 예속시키고 만호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원에서는 충렬왕의 의견을 받아들여 [[탐라만호부|탐라군민만호부]]를 세웠고, 탐라총관부는 폐지된다. 이 때를 기점으로 [[좌씨]]가 국내에 정착해 살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 군사 == 1273년 원나라에서 온 진수군 1,700명이 제주도에 주둔했다. 제주도에는 고려인 주둔군도 있었고, 두 번째의 [[일본 원정]]에서 군대의 수를 다 채우기 힘드니 고려인 진수군 1,000명만을 보낼 것을 청한다. 1281년에는 탐라의 진수군 50명이 육지에 나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으며, 군사 관련 업무는 [[정동행성]]에 이양된다. 1281년에서 1282년 사이 원나라에서 몽골인과 [[한족|한인(漢人)]] 군대 1,400명을 보내 진수군이 늘어나고 원나라에서 장비 등이 지급된다. 1293년[* 음력으로는 1292년 12월.] 탐라 진수군의 지휘권은 고려 국왕에게 넘어간다. 1294년 기준으로 탐라 진수군은 1,400명으로, 고려인 1,000명에 몽골인 400명으로 구성됐다. 다루가치 탑랄적의 제안으로 몽골인 군사마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총관부는 탐라의 군사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 주요 정치인 == || '''이름''' || '''재임기간''' || '''비고''' || ||<-3> 탐라국초토사 || ||[[실리백]](失里伯) || 1273 ~ ? || || ||<-3> 다루가치 || ||손탄(遜攤) || 1275 ~ ? || || ||[[탑랄적]](塔剌赤) || 1276 ~ ? || || ||탑자아(塔刺兒) || 1287 ~ 1293? || || ||아살(阿撒) || 1293 ~ ? || [* 아철(阿撤)이라고도 한다.] || ||노열니타(奴列你他) || 1333 ~ ? || || [[분류:고려(원간섭기)]][[분류:제주특별자치도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