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영국의 근대 철학자]][[분류:영국의 역사학자]][[분류:영국 남성 작가]][[분류:에든버러 대학교 출신]][[분류:에든버러 대학교 재직]][[분류:1795년 출생]][[분류:1881년 사망]][[분류:덤프리스 갤러웨이 출신 인물]] ||<:>'''{{{#EFD88F 토머스 칼라일 관련 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에든버러 대학교의 부총장)] ---- }}}|| ||<-2> '''{{{+1 토머스 칼라일}}}[br]Thomas Carlyle'''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xpaHB91.jpg|width=100%]]}}} || ||<|2> '''출생''' ||[[1795년]] [[12월 4일]]|| ||[[영국]] [[스코틀랜드]] 에클페찬[*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Thomas-Carlyle|#]]]|| ||<|2> '''사망''' ||[[1881년]] [[2월 5일]] (향년 85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영국)]|| || '''직업''' ||역사학자, 작가|| || '''서명'''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Signature_of_Thomas_Carlyle.svg|width=150]]}}}|| [목차] [clearfix] == 개요 ==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철학자, 사학자 및 비평가로 이름을 남겼다. 대자연은 [[신]]의 의복이고 모든 상징, 형식, 제도는 가공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경험론 철학과 공리주의에 도전했다. [[에든버러 대학교]] 명예총장이었으며, 유명한 저서로는 《영웅숭배론》, 《[[프랑스 혁명]]》 등이 있다. 전기 작가로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올리버 크롬웰]]을 다룬 책도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로써 역사가 몇명의 영웅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들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영웅사관]]을 19세기 동안 널리 퍼트린 장본인이다. 이런 [[영웅사관]]은 20세기에 [[허버트 스펜서]]에게 비판받을 때까지 주요 역사학 조류로 받아들여졌다. 당대의 세습[[귀족]]을 비판했다. 그는 귀족을 "하는 일이라고는 [[잉글랜드]]가 낸 세를 마음껏 소비하고 잉글랜드의 자고사냥이나 한다"고 비아냥거리고 혈통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귀족을 선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불안',정영목 역,은행나무,2011,p105] 일반인들에겐 그의 이름이나 작품보다도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혹은 인도는 포기할 수 있으나 셰익스피어는 포기할 수 없다.)" 란 말로 유명하며, 이 유명한 구절은 바로 《영웅숭배론》에 나온다. 하지만 이 문장은 약간의 의역이 가미된 형태이다. 원 문장은 다음과 같다. >'Indian Empire will go, at any rate, some day; but this Shakspeare does not go, he lasts forever with us.' >(직역)-'[[인도 제국]]은 어쨌든 사라지겠지만, 셰익스피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 일화 == * 《프랑스 혁명》[*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는 1859년 11월에 쓴 프랑스대혁명을 다룬 작품 《두 도시 이야기》의 저자 서문에서 "칼라일의 훌륭한 책이 보여준 철학에 뭔가를 더 보태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만, 그 무시무시한 시절을 이해하는 데 쓰이는 대중적이고 생생한 매체들에는 뭔가를 보태고 싶었다"라고 썼다.]이란 작품을 쓸 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 그는 그리 넉넉치 못한 형편에서도 수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프랑스 혁명》이란 책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친구이자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에게 보내 이 방대한 양의 원고의 감수를 맡겼는데, 밀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하녀가 그 원고를 쓰레기인 줄 알고 몽땅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친구 밀에게 이 사건을 전해 들은 칼라일은, 물론 심정이야 증오의 말로 책 한권을 가득 채워도 분이 풀리지 않았겠지만, 그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편지를 보내고, 새로이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한다. || 3년이 지난 후 1837년, 마침내 완성된 프랑스 혁명을 선보이고,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크게 알려져 성공하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 [[악필]]인 것으로 유명해 관련 일화가 있다. ||토마스 칼라일의 책을 맡은 [[런던]]의 인쇄소에서 악필로 유명한 그의 원고를 작업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베테랑 문선공을 스카웃하였다. 그 문선공은 자기가 작업할 원고를 받아들고는 소리쳤다. '''"젠장! 팔자 한번 사납군! 이 인간 원고 피하려고 런던까지 도망쳤는데!"'''|| 위의 <프랑스 혁명> 일화와 연결하면, 밀의 하녀는 칼라일의 악필을 보고 도저히 원고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쓰레기로 여긴 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