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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00,#ddd 통일신라-발해 관계 관련 틀}}}''' || ||<-7><:><#fff,#2d2f34>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한국의 역사)] [include(틀:신라의 대외관계)] [include(틀:발해의 대외관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삼국시대]]와 달리 [[남북국시대]]에는 양국 간 큰 전쟁이 없었고 대신 양국은 [[신라도]]를 통해 교역을 자주 했다. 단, 빈공과 경쟁이나 의전 서열 관련 분쟁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라이벌 의식이나 얕은 적대감은 존재했다.[* 최치원의 문집에서 빈공과에 발해인 합격자들이 늘어나자 비판하는 글을 적었다.[[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bh.d_0027_0250&setId=279528&position=14|#]]] == 역사적 관계 == === 성립 ===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뒤,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당나라로 끌려가거나 신라로 이주했다. 신라에 정착한 고구려인들은 [[고구려부흥운동]]을 진행했다. 신라는 [[보덕국]]을 세웠지만, 보덕국은 이후에 해체됐다. 698년에 [[고왕|대조영]]이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했다. === 초반 ===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뒤, 신라측에선 대조영에게 [[대아찬]]이란 벼슬을 줬다.[* 대아찬이 진골 이상부터 받을 수 있는 신라의 관직이었으니 국가 수장으로서 인정해 준 셈이다.] 발해가 2대 국왕 [[무왕(발해)|무왕]]때부터 영토를 확장하면서 발해는 당나라와 [[발해-당 전쟁|전쟁]]을 치렀다. 당나라는 신라에게 발해 공격을 요청했지만, 도중에 폭설로 인해 중지됐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42702&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에도 언급돼 있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42881&categoryId=49615&cid=49615|#]]] 통일신라와 발해는 문왕때부터 신라도를 통해 교역이 이뤄졌다. 한편, 일본이 발해에게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신라를 공격하자고 제안]]했지만, 발해가 거절했다. 790년 3월 [[원성왕]]때 신라는 발해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42709&categoryId=62145&cid=62145|사신 백어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 중반 === > 龍原의 동남쪽 연해는 日本道이고, 南海는 新羅道이다. 압록은 朝貢道이고, 長嶺은 營州道이며, 부여는 거란도이다.[[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kr.d_0003_0030_0020_0020&setId=621228&position=1|#]] > [[신당서]] 북적열전(北狄列傳) 발해조(渤海條) 발해는 10대 국왕 [[선왕]]때부터 [[요동]]을 수복하는 등 영토확장이 일어나자 신라측은 장벽을 세웠다. 통일신라와 발해는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지만, 당나라로 유학한 신라인 유학생들과 발해인 유학생들은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신라와 발해는 신라도를 통해 교역을 활발히 했다. 양국은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비중이 높았다.[[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20725.010300711400001|#]] 발해와 통일신라는 당나라와의 교역, 교류를 통해 여러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1967322|#]] 신라도를 통해 신라의 천정부에서 책성부까지 39개의 [[역참]]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bh.d_0037_0160&setId=609951&position=3|#]] 812년 헌덕왕 때 통일신라가 발해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42712&categoryId=49615&cid=49615|사신을 보낸 기록]]이 존재한다. 826년 7월 헌덕왕 때 통일신라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42712&cid=62145&categoryId=62226|패강에 장성 300리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 후반 === > 十二年春 北鎭奏 狄國人入鎭 以片木掛樹而歸 遂取以獻 其木書十五字 云 寶露國與黑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 > 12년(886년) 봄, 북진에서 보고하길 적국인이 진에 들어와, 진에 들어와 판자 조각을 나무에 걸고 돌아갔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가져다 바쳤다. 그 나무 조각에는 글이 15자 쓰여 있었는데, “보로국(寳露國)과 흑수국(黒水國)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친해 소통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bh.d_0001_0270&setId=621571&position=0|#]] > [[삼국사기]] 통일신라와 발해는 800년대 후반부터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통일신라는 887년에 [[진성여왕]]의 즉위로 혼란이 계속됐다. 892년에 [[후백제]]가 건국된 것을 시작으로, 901년에 [[후고구려]]가 세워졌다. 통일신라는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후삼국시대|신라]]로 나뉘어 지면서 [[후삼국시대]]가 시작됐다. 발해는 800년대 후반부터 [[말갈]]족들이 이탈하는 등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보로국]]과 [[흑수국]]에서 화친을 맺기를 희망한다는 기록이 존재한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42721&categoryId=49615&cid=49615|#]] 거란의 위협이 커지면서 발해의 15대 국왕 [[대인선]]이 신라와 동맹을 맺을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란의 위협을 막기 위해 신라에 병력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신라 역시 발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건 둘째 치더라도 후삼국으로 분열된 혼란기였던지라 남을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 종결 === 926년에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수많은 [[발해유민]]들이 [[고려]]로 이주하며 양국 관계는 종결됐다. 신라 역시 머지않은 935년에 고려에 합병되며 양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관련 사건 == * [[삼국통일전쟁]] * [[나당전쟁]] *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 같이 보기 == * [[신라도]] * [[삼한일통]] * [[남북국시대]] * [[후삼국시대]] [각주] [[분류:남북국시대]][[분류:통일신라]][[분류:발해]][[분류: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분류:나무위키 외교 프로젝트]][[분류:과거의 외교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