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2664><:> '''{{{+1 {{{#FFFFFF 파나마 운하 지대 [br] Panama Canal Zone [br] Zona del Canal de Panamá }}}}}}''' || ||<-2><:> [[파일:525px-Flag_of_Panama_Canal_Zone.svg.png|width=150]] ||||<-2><:> [[파일:210px-Seal_of_the_Panama_Canal_Zone.svg.png|width=120]] || ||<#002664><-2><:> '''{{{#fff 기}}}''' ||<#002664><:> '''{{{#fff 문장}}}''' || ||<-4><:> [[파일:CanalZone.png|width=250]] || ||<#002664><-4><:> '''{{{#fff 1903년 ~ 1979년}}}''' || ||<-2><#002664> '''{{{#fff 성립 이전}}}''' ||<-2><#002664> '''{{{#fff 반환 이후}}}''' || ||<-2><#ffd700> '''[[콜롬비아|{{{#0038a9 콜롬비아}}}]]''' ||<-2><#025bad> '''[[파나마|{{{#ffffff 파나마}}}]]''' || ||<#002664><:> '''{{{#fff 위치}}}''' ||||[[파나마 운하]]와 주변 8km 지역 || ||<#002664><:> '''{{{#fff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 || ||<#002664><:> '''{{{#fff 면적}}}''' ||||1,432km^^2^^ || ||<#002664><:> '''{{{#fff 수도}}}''' ||||[[발보아]] || ||<#002664><:> '''{{{#fff 통화}}}''' ||||[[미국 달러]], [[파나마 발보아]] || ||<#002664><:> '''{{{#fff 언어}}}''' ||||[[영어]], [[스페인어]]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나마 운하]] 주변 8km 지역에 존재하던 [[미국]]의 [[조차지]]이다. [[파나마]]의 [[대도시]]이던 [[파나마시티]]와 [[콜론]]은 파나마 운하 지대에서 제외되었으며, 이 도시들은 [[파나마]]의 영토였다. == 역사 == [[미국]]은 [[중남미]]의 세력 확장과 파나마의 전략적 위치를 고려해 [[파나마 운하]]를 착공하려 하였다. 미국은 [[1903년]] [[1월 22일]], 파나마를 영유하던 [[콜롬비아]] 측에 1000만 [[미국 달러|달러]]를 즉시 제공하고 연간 25만 달러 씩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파나마 운하 지대를 100년간 양도한다는 내용의 헤이-헤란 조약을 맺었지만 콜롬비아 상원이 이를 비준하지 않고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미국]]은 파나마의 [[분리주의]] 세력에 접근했고, 파나마는 [[1903년]] [[11월 3일]] 독립을 선언했다. [[콜롬비아군]]은 당장 개입을 하려했으나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의 저지로 결국 파나마가 독립했다. 파나마 독립 이후인 [[1903년]] [[11월 18일]],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이 미국과 파나마 양국 간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1000만 달러를 파나마 측에 제공하고 [[파나마 운하]]를 무기한 임대했다. 이후 파나마 운하가 건축되었다. 건축 과정은 파나마 운하 문서의 [[파나마 운하#s-2.2|문단]] 참조. 파나마 운하 건설 이후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잘 써먹었다. [[미국인]]들은 파나마 운하로 많이 이주하기도 했으며, 이들을 위한 [[인프라]]가 많이 세워졌다. 파나마 운하에는 [[미합중국 남부사령부]](USSOUTHCOM)가 설치되기도 하여 [[미국]]의 군사적 요충지로도 쓰였다.[* 파나마 운하 반환 이후 [[1999년]] [[마이애미]]로 이전되었다.] 파나마는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였다. 파나마 내에서는 파나마 운하 지대를 반환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며 파나마 운하 지대에 살던 파나마인들도 파나마로 돌아가길 원했다. 파나마 국기도 파나마 운하 내에서 게양이 금지되었다. 결국 [[1959년]] [[11월 3일]] 파나마 독립 기념일에 맞춰 파나마인들이 파나마 운하 지역으로 몰려가 [[반미]] [[폭동]]을 일어켰다. [[미국]]은 [[미국의 법 집행|경찰]]과 [[미군|군대]]를 동원해 진압했고 시위대 2명을 체포했으며, 9명이 사망했다. [[1963년]]에는 [[존 F. 케네디]]가 파나마 운하에서 파나마 국기와 [[성조기]]를 둘 다 게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케네디가 사망하면서]] 파나마 운하 지대 주지사인 로버트 존 플레밍은 둘 다 게양하지 말라는 방침을 내렸다. 이에 [[미국인]]들은 [[성조기]]를 게양할 수 없다는 것에 반발했고 파나마 운하 지대의 발보아고등학교에 성조기를 단독으로 게양하자, 파나마인 학생들이 몰려가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연히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충돌 속에서 파나마 국기가 찢어졌다. 결국 다시 폭동이 벌어졌다. [[1964년]] [[1월 9일]]의 일이었다.[* 파나마에선 이 날을 순교자의 날이라며 기념일로 삼고 있다.] 이번엔 [[1959년]] 사건과 달리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사건이 번졌다. 미국 기업의 공장들을 불태우고, 5000명 정도의 시위대가 모였다고 한다. 결국 28명이 사망했고, 324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과 [[소련]], [[쿠바]] 같은 [[공산주의]] 국가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전통적인 [[북대서양 조약 기구]] 소속 우방국과 [[베네수엘라]], [[브라질]] 같은 남미의 [[친미]] 국가들도[* 베네수엘라는 당시 친미였다.] 입을 모아 미국을 비난했다. 파나마 정부도 미국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1964년]] [[1월 10일]] 미국과 [[단교]]했다.[* 같은 해 [[4월 3일]] 재수교했다.] 결국 파나마 운하 지역 반환을 결정하게 되고, [[1977년]] [[9월 7일]] [[토리호스-카터 조약]]을 맺었다. [[1979년]] [[10월 1일]]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파나마 측에 반환했다. 이 조약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가 자신의 공약으로(파나마 주둔 [[미군]] 철수 공약) 열성적으로 추진했다. 파나마에서는 이 조약 비준을 [[국민투표]]에 회부해 67%의 찬성(투표율 96%)을 얻어 조약을 비준했으며[* 당시 파나마는 [[오마르 토리호스]]의 독재 치하에 있어 미국 내에서는 비민주적인 파나마가 투표 결과를 조작할 것이라는 이유로 조약에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는데, 이에 토리호스는 투표 몇 주 전을 앞두고 일시적으로 정당 활동 탄압 및 언론 검열을 완화한 바 있다.] 미국에서는 [[미국 상원|상원]]에서 찬성 68 대 반대 32로 비준 동의에 필요한 2/3 찬성(67명 찬성)을 가까스로 넘어 비준되었다. 당시 미국은 몰랐던 사실로, 파나마 내 과격파들은 만약 이 조약이 체결되지 않을 경우 운하 자체를 파괴해버릴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이는 [[파나마군]]의 장교로서 나중에 파나마의 실권자 자리에 오른 [[마누엘 노리에가]]가 세운 계획으로, 노리에가는 이미 수년 전부터 운하 주변 마을에 자기 심복들을 심어두고 [[폭약]] 등 [[사보타주]]에 필요한 장비를 운하 주변에 묻어두기까지 했다. 이 계획의 암호명은 "huele a quemado"(타는 냄새)였으며, 만약 조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파나마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작전 개시를 알리는 [[암구호]]가 송출되고, 노리에가의 부하들이 한밤중에 운하의 중요 시설을 모두 파괴해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갑문을 모두 수리해도 운하를 다시 사용하려면 3년간에 걸쳐 빗물을 받아야 하는데다, 노리에가는 미국이 운하를 수리하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으며 미국을 상대로 [[베트남 전쟁]] 시즌 2에 가까운 정글 게릴라전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조약이 미국 상원을 통과한 것은 미국과 파나마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행운이었다. [[1979년]] [[10월 1일]]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파나마 측에 반환했으나 파나마인들은 운하 자체를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1999년]] [[12월 14일]] 파나마 운하 반환 협정을 맺고 그해 [[12월 31일]] 파나마 운하를 반환했다. [[1914년]]에 완공된 이후 85년만에 이뤄진 일이였다. 권한 이양 행사 당시 [[미국 정부]]의 고위 공직자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아서 미국이 파나마 운하에 가진 미련을 드러내기도 했다. == 관련 문서 == * [[미국-파나마 관계]] [[분류:파나마의 역사]][[분류:미국의 식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