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타악기)] [목차] ||[youtube(Xs80hpz-ZEg,width=640,height=360)]|| || 중국 전통편경의 모습 || == 개요 == 편경([[編]][[磬]])은 [[중국의 전통악기]]중 하나이며, [[국악]]에서도 사용되므로 [[국악기]]에 포함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려]] 때 [[북송]]에서 수입된 아악기로 黃=C인 당악 음정을 따른다. [[편종]]과 쌍을 이루는 악기로 흔히 '종경(鐘磬)'이라고 아울러 부른다. == 설명 == [[체명악기]]의 일종으로, ㄱ자 모양으로 깎은 경돌(옥) 16개를 두 단으로 된 나무 틀에 위아래 여덟 개씩 매단 악기다. 나무틀의 발 부분은 [[기러기]](鵝) 모양 받침대에 각각 꽂아 놓는다. 틀 위쪽 양편에는 [[봉황]]의 머리 모양으로 조각하고, 꼭대기에는 [[공작(조류)|공작]] 다섯 마리와 [[꿩]] 깃으로 만든 술로 장식한다. 경돌은 ㄱ자 모양에서 세로 획 부분이 긴 모양인데, 세로 획과 가로 획의 비율은 음이 높아짐에 따라 작아진다. 조율할 때는 소리가 높으면 돌을 갈아서 얇게 하고, 소리가 낮으면 세로획 부분을 잘라서 음을 맞춘다. 고로 조율이 무척 어려워서 정확한 음정으로 편경을 조율하기는 매우 힘들다. 하지만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음정이 [[온도]]나 [[습도]]에 영향을 덜 받으므로 국악기 조율의 표준이 된다. 2007년 제작된 국립국악원 편경의 조율 방법은 이렇다. 먼저 조율하기 전 경석을 갈아낼 부분을 감안하여 넉넉한 두께로 재단한 다음, 3차에 걸쳐 연마하며 재단한다. 1차 조율은 대형 그라인더를 동원하여 갈아내는데 이때 마찰열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물을 뿌리면서 습식으로 연마한다. 조율할 때 경돌이 물을 많이 흡수함을 감안하여 음정을 확인한다. 이후 약 보름간 건조하여 [[튜너]]로 음을 확인하고, 세로 부분 길이와 경돌의 두께를 조절하며 다시 조율한다. 물론 갈 때 열이 많이 나기 때문에 식혀가면서 조율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3차 조율은 정밀기기를 동원하여 [[센트]] 단위까지 정밀조율한 후, 습기를 머금어 음이 변함을 막고자 광택제를 뿌려 마무리한다. 연주할 때는 뿔로 만든 망치인 각퇴(角槌)로 세로획 부분의 아래 끝부분을 치면서 연주한다. 바리에이션으로 경돌이 1개만 있는 [[특경]]이 있다. 경돌의 두께는 제일 얇은 것이 2.4 cm, 제일 두꺼운 것이 6 cm라고 한다. 특이한 점으로는 경돌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더욱 높은 음이 난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기준 ㄷ자 모양으로 음정이 올라간다. == 역사 == 한반도에는 12세기 초 [[고려]] [[예종(고려)|예종]]대에 [[북송]]에서 처음 들어왔고, [[공민왕]] 때와 [[태종(조선)|태종]]대에도 [[편종]]과 함께 수입되었다고 한다. 재료가 일종의 [[옥]]인 만큼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조선]] [[세종대왕|세종]]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수입해다 썼는데, 수입만으로는 수요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흙]]으로 빚어서 [[기와]]처럼 구워 만든 개와경도 만들어 썼다. 당연히 흙은 구울 때 수축하기도 하고 구운 후에 조율할 수도 없어 음정은 엉망이었다. 결국 국내에서 백방으로 경석이 나는 곳을 수소문한 결과 세종 7년(1425) [[남양읍|남양]](南陽: 현재 [[화성시|화성]]의 일부)에서 좋은 옥이 발견되었다. 세종 9년(1427)에 처음으로 국산 편경을 제작하였는데, 중국산보다 음색이나 음정이 훨씬 좋았다고 전한다. 이후 현재까지도 편경에 쓰는 옥은 옛 남양인 [[수원시|수원]]과 [[화성시|화성]] 근처 옥 광산에서 캐서 쓴다.[* 이렇게 만들어진 편경을 처음 시연할 때 [[세종대왕]]은 [[박연]]이 만든 편경의 소리를 듣고 夷 음을 내는 돌이 덜 갈려 음정이 잘못되었음을 정확히 집어내어 [[세종(조선)/업적#s-3.4|#]] [[절대음감]]을 보여준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편경 재료의 산지와 제작기술이 실전되고, 한국에서 재료의 산지를 찾지 못해 대신 중국 방방곡곡을 뒤져 적합한 돌이 나는 산지를 찾아내 재료를 수입해서 제작기술만을 복원했다가 오랫동안 잊혔던 국내 산지를 다시 발견해 다시 국산화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649940.html|#]] 재료가 재료이다보니 악기가 무척 귀해서 편경을 파손시킨 사람은 [[곤장]] 백 대에 3년 동안 [[귀양]]을 보낸다는 형조가 대전통편에 있다. 그리고 대전통편에는 전란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편경을 숨기라는 내용도 있다[* 주로 우물이나 연못 바닥에 경석을 가라앉혀 숨겼다고 한다. 역시 재료가 옥이라 물에 빠뜨리는 정도로 손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악기의 기준음에 해당하기에 편경만 무사하면 나머지 악기를 다시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경이 국보급 악기로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현재는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보허자]], [[낙양춘]]에 편성되고 [[취타]]를 대편제로 연주할 때도 간혹 편성된다. 편경과 관련해서 세종대왕의 음악적 재능을 보여준 일화가 있는데 박연이 편경과 편종을 새로이 만들고 시험연주를 했는데 이에 세종대왕은 칭찬하면서도 '''"다만 이칙(夷則) 1매(枚)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라고 물어 박연이 확인해보니 과연 그 자리는 아직 미처 다 갈리지 않아 먹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갈고 연주했더니 그제서야 소리가 바르게 되었다고 한다. [[분류:국악기]][[분류:타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