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대북방전쟁)] ||<-3> {{{+1 '''폴타바 전투'''}}}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rten's_Poltava.jpg|width=100%]]}}}|| || '''시기''' ||<-2>1709년 6월 27일 |||| || '''장소''' ||<-2>동 [[우크라이나]] [[폴타바]] || || '''원인''' ||<-2>[[대북방전쟁]] 중 시작된 [[칼 12세]]의 러시아 원정 || || '''교전국''' ||[[파일:스웨덴 해군기.svg|width=28]] [[스웨덴 제국]] ||[[파일:러시아 국기.svg|width=28]] [[루스 차르국]] || || '''지휘관''' ||[[파일:스웨덴 해군기.svg|width=28]] 칼 구스타브 렌셸드 ||<^|1>[[파일:러시아 국기.svg|width=28]] [[표트르 1세]][* 다만 표트르 1세는 얼굴마담이었고 실제로는 보리스 셰레메테프(Бори́с Петро́вич Шереме́тев 1652~1719)가 지휘했다.] || || '''병력''' ||30,000명 ||75,000명 || || '''피해''' ||6,900명 사망 및 부상 2,800명 포로 ||1,345명 사망 3,290명 부상 || || '''결과''' ||<-2>루스 차르국의 결정적 승리 || || '''영향''' ||<-2>[[스웨덴 제국|스웨덴]]의 우위 상실, [[칼 12세]]의 [[오스만 제국]]으로 도피로 인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제5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발발]], [[루스 차르국|러시아]]가 전쟁의 우위를 가져가 스웨덴 제국의 종말의 시작을 알림 || [목차] [Clearfix] == 개요 == [[러시아어]]: Полтавская битва [[스웨덴어]]: Slaget vid Poltava 폴타바 전투는 [[대북방전쟁]]이 진행되던 1709년 6월 27일, 동우크라이나의 [[폴타바]]에서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 제국]] 사이에 벌어진 [[클라이맥스|최대의 전투이다.]] 루스 차르국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전쟁에 전환점이 바뀌었다. == 배경 == 대북방 전쟁 초기 [[나르바]]에서 대패한 [[표트르 1세]]의 [[러시아 제국군|루스 차르국군]]은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잉그리아]] 지역을 점령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워 [[러시아 제국 해군|해군력]]을 증강하는 한편 군사력을 재정비하는데 성공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굴복시켜 [[아우구스트 2세]]를 [[작센 선제후국]]으로 내쫓는 한편 친스웨덴파 귀족인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새 국왕으로 선출시킨 칼 12세는 표트르 1세가 점거한 잉그리아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표트르 1세가 이를 거부하며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708년 [[흐로드나|그로드노]]에서 약 9,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친정한 표트르 1세는 소규모 부대만 이끌고 나온 칼 12세에게 쪽도 못쓰고 발린 후 이대로 가면 승산이 없다 판단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제외한 잉그리아 전역을 반환하고 [[타르투|도르파트]]와 나르바도 적절한 배상금을 지불하면 돌려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칼 1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엄포를 놓았고 이로서 양국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벨라루스]] 일대를 가로질러 러시아 중부의 [[스몰렌스크]]를 공략하였으나 표트르 1세의 초토화전술과 강력한 방어에 휘말려 제대로 공략은 성공 못하고 군사력만 낭비하였다. 이에 방향을 돌려 [[우크라이나]]로 남하했는데 당시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헤트만인 [[이반 마제파]]가 칼 12세를 적극 지원하여 루스 차르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일제히 봉기하였다. 허나 레스나야 전투에서 아담 루드비그 레벤하웁트(Adam Ludwig Lewenhaupt 1659~1719)가 이끌던 스웨덴 별동대가 루스 차르국군에 패배하면서 보급이 끊겼고 카자크 근거지가 제압당하면서 일부 카자크는 마제파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루스 차르국에 충성을 다짐했다. 따라서 마제파가 약속했던 2만이 넘는 지원군은 5~7천 밖에 오지 않았다. 이와중에 1708년 말에서 1709년 초에 찾아온 엄청난 대한파 때문에 한동안 전투를 치르지 못 하고 전황이 지체되었던데다, 군량도 슬슬 떨어져가고 표트르 1세가 풀도 태워서 시간이 촉박해진 스웨덴-카자크 연합군은 결전을 위해 1709년 [[폴타바]]를 포위하였고 이에 표트르 1세는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정예병을 이끌고 우크라이나 폴타바로 진격하였다. == 전개 == == 결말 == == 영향 == 이 전투는 대북방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 후, [[덴마크-노르웨이 왕국|덴마크]]가 전선에 복귀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폐위된 아우구스트 2세가 복위하여 스웨덴에 대항했다. 그리고 발트해 지역은 1년 만에 러시아에게로 넘어갔다. 전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스웨덴의 우위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이 전투는 스웨덴에게 있어서 [[멸망|종말이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담긴 전투였다.]] 이후 [[루스 차르국]]은 1721년에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하여 [[러시아 제국]]이 되었다. 이 전투 후 스웨덴으로 돌아갈 길이 없어진 칼 12세는 패잔병과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다. 표트르 1세는 칼 12세를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파디샤]] [[아흐메트 3세]]는 이를 거부 하였고, 칼 12세 또한 전쟁에 참여 할 것을 촉구해 결국 [[러시아-튀르크 전쟁|결국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된다.]] 전쟁은 [[몰다비아 공국]]의 [[프루트 강]] 일대에서 주로 전투가 벌어졌다. 표트르 1세가 친정했으나 1711년 프루트 강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위당했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왈라키아 등 [[정교회]] 신민들이 궐기할 것을 가정하고 일으킨 전쟁이었으나 이들이 모두 호응하지 않아 중과부적이었기 때문에 표트르 1세는 빠르게 항복하여 강화를 요청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후 처리를 위해 체결된 '프루트 조약'의 결과, 오스만 제국은 [[아조프]]의 영유권을 되찾고 몰다비아 일대의 루스 차르국 요새들을 점거하였다. 그러나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오스만 제국군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대북방전쟁 전체의 전황은 계속 루스 차르국에게 유리했고 결국 루스 차르국은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 제국]]을 해체하고 [[발트 해]] 진출에 성공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스웨덴의 대외전쟁)][include(틀:루스 차르국의 대외전쟁)][include(틀:스웨덴 관련 문서)][include(틀:러시아 관련 문서)] [[분류:1709년]][[분류:유럽의 전쟁]][[분류:러시아 제국의 역사]][[분류:스웨덴의 역사]][[분류:폴란드의 역사]][[분류:러시아-폴란드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