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나폴레옹/26인 원수)] ||<-2> {{{#ffd700 '''{{{+1 제1대 단치히 공작,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br]François Joseph Lefebvre, 1er Duc de Dantzig''' }}} ||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attachment/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르페브르.jpg|width=100%]]}}} || ||<|2> '''출생''' ||1755년 10월 25일 || ||[[프랑스 왕국]] 루파흐[br](現 [[그랑테스트]] [[오랭]] 루파크) || ||<|2> '''사망''' ||1820년 9월 14일 (향년 64세) || ||[[부르봉 왕정복고|프랑스 왕국]] [[파리(프랑스)|파리]]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계급)|원수]] 중 한 명. 초대 단치히 [[공작(작위)|공작]]. == 생애 == 르페브르는 알자스의 루파흐에서 경[[기병]] 연대 병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774년에 [[프랑스군]]에 입대했으며,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프랑스 방위군"[* 꽤 역사가 깊은 연대인데, 샤를 9세 시절에 9천명의 병력으로 설립되었으며(1563) 국가와 시민의 안녕 그리고 왕가 수호의 임무를 띤 연대였다. 이를테면 헌병대와 비슷하다고 할까.] 하사로서 혁명에 참가했다. 1793년에는 여단장으로 진급했고, 플로이루스 전투에서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잘 해놓고도 적을 추격하지 않았다고(…) 우샤르 장군이 처형당한 뒤, 1797년 9월에 그는 상브르-뫼즈 강 방면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1799년 그는 [[장바티스트 주르당|주르당]]이 이끄는 다뉴브 방면군의 선발대를 맡아 지휘했다. 그리고 같은 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파리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나폴레옹을 적극 지원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르페브르를 프랑스 상원의원으로 지목했고, 1804년에는 [[원수봉]]을 받았다. 르페브르는 [[독일.폴란드 원정]] 당시 무장 근위대 사단을 지휘했고, 1806년의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는 제국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이듬해 1807년에는 단치히를 공격해 점령했고, 그 공으로 단치히 공작이 되었다. 1808년 르페브르는 반도전쟁에 참가했고, 1809년에는 에크뮐 전투와 바그람 전투에서 바이에른 군단을 지휘했다. 그러나 같은해에 그는 티롤리아 지방의 [[민병대]]장 안드레아스 호퍼[* 1767-1810. 이 사람은 엄청난 애국자인데, 그가 티롤의 민병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 계기는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에게 티롤리아 지방을 할양한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란츠 1세는 그를 돕지 않고 티롤을 프랑스에게 넘겨 그는 사로잡혀 총살되었다.]에게 무참히 깨졌다. 그 후 1812년부터 1814년까지 그는 고참 근위대를 지휘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슬슬 몰락해 가던 때, 상원에서 나폴레옹의 퇴위를 가지고 투표하게 되자 찬성표를 던졌고, [[루이 18세]]에 의해 귀족원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 [[백일천하]]를 시작하게 되자 다시 나폴레옹을 지원하러 달려갔고, 그 때문에 제2차 왕정복고 당시 귀족원에서 제명당했다. 하지만 여전히 원수직은 유지할 수 있었다. 1819년에 루이 18세로부터 다시 귀족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았고, 1820년에 죽었다. 죽은 뒤에는 페르 라셰즈(Père-Lachaise)에 [[앙드레 마세나]] 근처에 묻혔다. 향년 65세. [[분류:프랑스 제국 원수]] [[분류:독일계 프랑스인]] [[분류:1755년 출생]] [[분류:1820년 사망]] [[분류:페르 라셰즈 묘지 안장자]] [[분류:오랭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