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덴마크 국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d000f, #ec0013 20%, #ec0013 80%, #bd000f)" '''{{{#fff 프레데리크 7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아이슬란드 국왕)]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d000f 0%, #ec0013 20%, #ec0013 80%, #bd000f)" '''[[덴마크 국왕|{{{#fff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 제16대 국왕}}}]][br]{{{+1 프레데리크 7세}}}[br]Frederik VI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ederik_VII_af_August_Schi%C3%B8tt.jpg|width=100%]]}}} || ||<|2> '''출생''' ||[[1808년]] [[10월 6일]] || ||[[덴마크]] [[코펜하겐]] || ||<|2> '''사망''' ||[[1863년]] [[11월 15일]] (향년 55세) || ||[[독일 연방]] 홀슈타인 공국 글뤽스부르크 || ||<|2> '''재위기간''' ||[[덴마크 국왕]],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 ||[[1848년]] [[1월 20일]] ~ [[1863년]] [[11월 1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가문''' ||[[올덴부르크 가문]] || || '''이름''' ||프레데리크 칼 크리스티안[br](Frederik Carl Christian) || || '''부모''' ||아버지 [[크리스티안 8세]][br]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샤를로테 프레데리케 || ||<|3> '''배우자''' ||덴마크의 빌헬미네 마리 ,,(1828년 결혼 / 1837년 이혼),,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롤리네 마리 ,,(1841년 결혼 / 1846년 이혼),, || ||루이제 라스무센 ,,(1850년 결혼),, || || '''종교''' ||[[루터교회]] ||}}}}}}}}} || [목차] [clearfix] == 개요 == [[올덴부르크 왕조]] 본가의 마지막 수장이자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덴마크 국왕|국왕]]. == 생애 == 부왕 [[크리스티안 8세]]에 의해 즉위 이전 2번 결혼했는데, 자식 없이 모두 이혼했다. 거기다가 유약했기 때문에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프레데리크 7세의 후계자로 육촌 동생인 [[크리스티안 9세]]를 들이기로 했다. 3번째로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3/Louise_Rasmussen.jpg|평민 여성]]과 결혼하긴 했으나 역시 자식이 없었다. 그의 사망으로 올덴부르크 왕조 본가는 완전히 단절된다. == 재위기간 행적 == 프레데리크는 즉위 이후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고, 이는 [[크리스티안 9세]]에 의해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그의 사망 이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들]]의 상속에 관한 문제로 외교적 위기와 전쟁이 발발한다. 자세한 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문서 참고. == 여담 == * 프레데리크 7세는 [[술]]을 즐기며 괴팍한 성격이었고, 덴마크 이곳저곳을 여행다니는 것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 세계적인 동화 작가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그의 치세 때의 사람인데, 당시 유력 정치인이었던 요나스 콜린을 통해 어린 나이에 생활고로 인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안데르센에게 학비를 지원해주기도 하고[* [[흙수저|가난한 도시 노동자의 아들]]이었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안데르센]]이 무슨 수로 이런 엄청난 인맥을 얻었나할 텐데, 정말 우연히도 그의 [[여사친]] 중의 한 사람이 요나스 콜린의 친구의 딸이어서 그랬다(...). 그리고 콜린 본인은 [[덴마크]] 왕족들과 친분이 있는 거물 정치인이라서, 직접 프레데리크 7세에게 표를 올려서 안데르센에게 왕실 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써줬다.], 나중에는 노년의 그에게 명예 군사 고문관 직위를 하사하고 어전에서 그의 작품을 낭독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왕으로서의 프레데리크 7세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안데르센 개인에게는 그야말로 인생을 바꿔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 [[프랑스]] [[부르봉 왕조]] 본가의 [[앙리 5세]]와 비슷한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적차남으로 태어났지만 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해서 사실상 장남이였으며, 프레데리크 7세와 앙리 5세 모두 올덴부르크 왕조 본가와 부르봉 왕조 본가의 마지막 직계 후손이자 군주(앙리 5세는 명목상)로 두 사람 모두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올덴부르크 왕조 본가와 부르봉 왕조 본가는 단절된다. 두 사람의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8세]]와 [[샤를 페르디낭]]은 적손은 끊겼지만 사생아를 많이 낳아서 생물학적인 후손들이 있다는 것도 비슷하다. 다만 차이점도 있는데 크리스티안 8세와 프레데리크 7세는 왕이지만 샤를 페르디낭은 왕이 아니고, 앙리 5세는 명목상 왕일 뿐 실제 왕은 아니였으며, 올덴부르크 왕조 본가는 덴마크 왕위를 계승할 방계 가문인 [[글뤽스부르크 왕조]]와 사이가 무난한 반면, 부르봉 왕조 본가는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방계 가문인 부르봉-오를레앙 왕조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분류:덴마크 국왕]][[분류:아이슬란드 국왕]][[분류:올덴부르크 가문]][[분류:1808년 출생]][[분류:1863년 사망]][[분류:코펜하겐 출신 인물]][[분류:로스킬레 대성당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