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리스 왕국 콘스탄티노스 1세의 왕비[br]{{{+1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br]Sophie von Preußen''' || ||<-3>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651397249192.jpg|width=100%]]}}} || ||<|2> '''이름''' || 독일어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br](Sophie Dorothea Ulrike Alice)|| || 그리스어 ||소피아 도로테아 울리키 알리키[br](Σοφία Δωροθέα Ουλρίκη Αλίκη)|| || '''출생''' ||<-2>[[1870년]] [[6월 14일]][br][[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신궁전|| || '''사망''' ||<-2>[[1932년]] [[1월 13일]] (향년 61세)[br][[바이마르 공화국|독일국]] 프로이센 자유주 헤센나사우 [[프랑크푸르트]]|| || '''배우자''' ||<-2>[[콘스탄티노스 1세]] ,,(1889년 결혼 / 1922년 사망),,|| || '''자녀''' ||<-2>[[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그리스)|알렉산드로스]],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엘레니]], [[파블로스]], 이리니, 에카테리니|| || '''아버지''' ||<-2>[[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 || '''어머니''' ||<-2>[[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 '''형제''' ||<-2>[[빌헬름 2세]],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샤를로테|샤를로테]],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하인리히]], 지기스문트, [[프로이센의 빅토리아|빅토리아]], 발데마어, [[마르가레테 폰 프로이센|마르가레테]]|| || '''종교''' ||<-2>[[루터교회]] → [[그리스 정교회]]|| || '''서명''' ||<-2>[[파일:Signature_of_Sophia_of_Prussia_(Queen_of_the_Hellenes).png|width=150]]|| [목차] [clearfix] == 개요 == [[그리스 왕국]] [[콘스탄티노스 1세]]의 왕비이자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4남 4녀 중 3녀(일곱째)이다. == 작위 == ||
<#FFFFFF> [[파일:Coat of Arms of Sophia of Prussia.svg |width=250]]|| ||<#F8BBD0> '''문장''' || *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Sophie of Prussia (1870년 6월 14일 ~ 1889년 10월 27일) * 그리스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Greece (1889년 10월 27일 ~ 1913년 3월 18일) * 그리스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the Hellenes (1913년 3월 18일 ~ 1917년 6월 11일) * 그리스의 소피아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Queen Sophia of Greece (1917년 6월 11일 ~ 1920년 12월 19일) * 그리스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the Hellenes (1920년 12월 19일 ~ 1922년 9월 27일) * 그리스의 소피아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Queen Sophia of Greece (1922년 9월 27일 ~ 1932년 1월 13일) == 생애 == ===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공주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95131-1340800216.jpg|width=100%]]}}} || || 가족 사진 || 조피는 1870년 6월 14일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신궁전에서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왕세자]]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4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이미 5명의 오빠와 언니들이 있었고[* 지기스문트 왕자는 조피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 큰 오빠 [[빌헬름 2세|빌헬름 왕자]]와는 11살 차이가 났다. 부모님인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황태자]]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금슬이 좋았으며 둘 다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다. 조피가 태어난 지 몇 주 뒤에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로 인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이로 인해 조피의 세례식은 우울한 분위기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고, 할아버지 [[빌헬름 1세]]는 [[독일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파일:소시와 모레타와 모시.jpg]] 조피와 언니 빅토리아와 여동생 마르가레테. 조피의 어릴 적 애칭은 소시(Sossy)였다.[* 큰언니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샤를로테|샤를로테]]는 샬리, 작은 언니 [[프로이센의 빅토리아|빅토리아]]는 모레타(Moretta), 밑에 막내 여동생 [[마르가레테 폰 프로이센|마르가레테]]의 애칭은 모시(Mossy)였다.] 조피의 조부모인 [[빌헬름 1세]] 부부는 아이들 중 나이가 많은 [[빌헬름 2세|빌헬름 황태손]], 샤를로테, 하인리히를 예뻐했기 때문에 찬밥 신세였던 세 딸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는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와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4남 발데마어 왕자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이후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고.] [[영국]] 출신인 어머니 빅토리아 황태자비의 영향으로 조피는 어린 시절부터 친영국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또한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을 자주 찾아갔으며, [[영국]]에 오랜 기간 동안 머물기도 했다. 특히 친가 쪽에서 조피에게 애정이 부족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조피 또한 여왕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884년 즈음 [[그리스 왕국]]의 [[콘스탄티노스 1세|콘스탄티노스 왕세자]]는 [[독일]]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프로이센]]의 근위대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때, 조피는 [[빅토리아 여왕]]의 골든 주빌리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랫동안 [[영국]]에서 머물렀으며, 1887년에 콘스탄티노스와 더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빠르게 발전하며, 빅토리아 여왕과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역시 콘스탄티노스를 훌륭한 신랑감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1888년 3월 1일 [[빌헬름 1세]]의 장례식에서 그리스 대표로 참석한 콘스탄티노스는 조피에게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리게 되었고, 1888년 9월 3일 약혼을 발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이 온전히 환영받지는 못했다. [[빌헬름 2세]] 부부와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의 어머니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로마노바|올가 왕비]]가 결혼을 탐탁치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혼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1889년 10월 [[아테네]]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조피의 생일 다음날인 1888년 6월 15일 사망했다. 새 황제가 된 오빠 [[빌헬름 2세]]는 자유주의적인 면모를 지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큰 아들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슬픈 마음으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빅토리아 황태후는 이후 딸들에게 더욱 의지하게 되며, 사망할 때까지 조피와 20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 [[그리스 왕국]]의 왕세자비 === 1889년 10월 27일, 조피는 [[콘스탄티노스 1세|콘스탄티노스]]와 [[아테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두 번 거행되었는데 한 번은 [[그리스 교회]]식으로, 다른 한 번은 [[개신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왕세자의 결혼식은 국민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두 사람의 이름은 콘스탄티노스 왕과 소피아 왕비가 왕위에 오르면 [[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 소피아]]가 그리스의 것이 된다는 전설을 연상시켰다. 이렇듯 두 사람의 결혼식은 그리스 국민들에게는 매우 환영받았지만, 대외적으로는 좋지 않은 분위기였다. [[프랑스]]에서는 [[그리스]]가 [[삼국 동맹]]에서 [[독일]] 편에 설까 봐 우려했고, 독일은 그리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오스만 제국]]과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를 도울 수 없었다. 결혼 이후 조피는 그리스식 이름인 [[소피아]]로 불렸다. 두 사람은 신혼 기간을 [[아테네]]에서 소박하게 보냈다. 소피아는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몇 년 안에 현대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차차 새 삶에 적응해 나갔다. 결혼식을 올린 지 9개월 후인 1890년 7월 19일, 소피아는 첫 아들인 [[요르요스 2세|요르요스 왕세손]]을 낳았다. 출생 당시에는 탯줄이 아기의 목을 감아서 위험할 뻔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다. 첫 아이를 낳은 후 소피아는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개종 소식에 그리스 왕족들은 모두 환영했지지만, 소피아는 [[프로이센]] 연합 교회의 수장이자 무엇보다 불복종을 가장 싫어하는 큰오빠 [[빌헬름 2세]]의 반응을 두려워했다. 1890년 11월, 소피아는 언니 [[프로이센의 빅토리아|빅토리아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빌헬름 2세]]에게 개종의 의사를 밝혔는데, 예상했던 대로 빌헬름 2세는 크게 반대했다. 특히 손위올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는 개종을 만류하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을 빚기도 했다.[* 훗날 아우구스테 황후는 이 일 때문에 여섯째 아이인 [[요아힘 폰 프로이센|요아힘 왕자]]를 조산했다고 주장했다.] 빌헬름 2세 또한 분개해서 소피아를 [[프로이센]] 왕족에서 빼버리기까지 했다.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화해하도록 권유했고 소피아는 결국 자신의 개종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썼지만 빌헬름 2세는 3년 동안 소피아의 독일 입국을 막아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1891년 5월 2일 소피아는 [[루터교회]]에서 [[그리스 교회]]로 개종했다. 하지만 독일 황실 측에서는 개종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빌헬름 2세]]는 동생이 자신에게 불복종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압박을 가했다. 소피아는 시어머니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로마노바|올가 왕비]]를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병원을 설립하는 등 자선 사업가로서 활동했다.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그리스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는데, 소피아는 [[적십자]]에서 부상당한 군인을 치료하고 간호사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그녀와 올가 왕비의 선행은 다른 여러 나라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스-터키 전쟁(1897)이 패배로 끝난 후 그리스 내에는 왕정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항상 여동생을 압박했던 [[빌헬름 2세]]는 공개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지지했고 동생과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어머니]], 할머니가 간청을 한 후에야 오스만 제국에 중재를 제의했다. 그는 전쟁에 개입한 대가로 그리스에 굴욕적인 조건에 응할 것을 요구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여동생의 동의를 얻어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스 1세|콘스탄티노스 왕세자]]도 전쟁에 진 책임을 지기 위해 국가 재판에 넘겨져야 하고, [[요르요스 1세]] 또한 [[오톤]]처럼 폐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실에 대한 반감이 심해지자 요르요스 1세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콘스탄티노스 1세|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소피아는 그리스를 떠나 [[독일]]에서 지내다 1899년에 귀국했다. 그리스에 돌아온 이후 소피아는 자선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이 즈음 [[유방암]]을 앓고 있던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와 여든이 넘은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건강이 모두 좋지 못했다. 당시 [[영국]]은 [[보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여왕의 건강이 악화될까 우려하였다.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이 [[뇌출혈]]로 사망했다. 소피아는 자신이 사랑하던 외할머니가 사망하자 매우 슬퍼하였고 [[영국]]에 방문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몇 달 후에는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를 찾아 독일을 방문했는데 그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당시 임신 5개월이었던 소피아는 빅토리아 황태후가 사망할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다. 1909년을 기점으로 그리스에는 쿠데타가 일어나 [[요르요스 1세]]의 아들들은 군대에서 사임되었다. 소피아도 이때 [[콘스탄티노스 1세|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그리스를 떠나 [[독일]]에 정착했다. 그 동안 그리스에서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거나, 왕정을 유지하되 [[오토 1세]]의 서자나 [[요르요스 2세|요르요스 왕세손]]을 왕위에 올리는 것에 대해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후 권력을 잡은 [[베니젤로스]]는 다행히 왕권을 약화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1년 간의 망명 끝에 1910년 10월 21일 그리스 왕족들은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아는 새 정부를 의심스러워했고 베니젤로스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다른 왕자들이 군대를 이끄는 동안, 소피아와 동서들[* 마리 보나파르트,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은 부상당한 군인들을 간호했다. 소피아는 올가 왕비와 함께 새 병원을 짓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한편 소피아는 신혼 초에는 [[콘스탄티노스 1세|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사이가 좋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그는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에 충격을 받았지만 시어머니 [[올가 콘스탄티노브나|올가 왕비]]가 그랬듯 조피는 그저 묵살해야만 했다. 1912년경부터는 두 사람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고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는 사망할 때까지 여러 정부를 두었다. 심지어 소피아가 1913년에 여섯째 아이인 에카테리니 공주를 낳았을 때 다른 남자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공식적으로는 콘스탄티노스의 자식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 왕비: 1차 재임 === [[파일:Sophie of Greece.jpg|width=100%]] 1913년 제1차 [[발칸 전쟁]]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고, 그리스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후 그리스와 [[불가리아]] 사이에서 [[테살로니키]]에 대한 영토분쟁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요르요스 1세]]는 주권을 주장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를 방문했는데, 아무 경호원 없이 산책을 하다 그만 [[아나키스트]]인 알렉산드로스 시나스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시아버지 [[요르요스 1세]]가 암살당했을 때 소피아는 [[아테네]]에 있었다. 그리스의 새 왕비가 된 소피아는 이 사실을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로마노바|올가 왕대비]]에게 전해야 했다. 다음 날 모든 그리스 왕족들은 [[테살로니키]]로 이동하여 요르요스 1세가 암살된 현장을 보고, 그의 시신을 그리스로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르요스 1세의 죽음으로 인해 [[테살로니키]]는 그리스의 영토가 되는 듯 했지만, [[마케도니아]]에 대한 분단을 둘러싸고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왕비가 된 후 소피아는 왕세자비 시절에도 그랬듯 소박한 생활을 이어갔다. 특히 국왕 부부는 남동생인 니콜라오스 왕자 부부와 매우 친해서, 매주 한 번 씩은 식사를 같이 했다고 한다. 또 소피아와 [[콘스탄티노스 1세]]는 모두 원예를 좋아해서 자유시간을 정원을 가꾸는데 보내기도 했다. 1914년 8월 4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에 아이들과 머무르고 있었던 소피아는 급히 귀국한다. 그리스는 처음에 중립국을 선언했으나 대중들은 전쟁에 참가하길 바랐고,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또한 [[오스만 제국]]을 패배시키기 위해 [[협상국]]으로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친독 성향이 강했던 콘스탄디노스 1세는 끝까지 참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베니젤로스는 국왕의 허락 없이 참전하려 했으나 결국 3월 6일 사임되었다. 연속된 전쟁과 베니젤로스와의 갈등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폐렴]]으로 인한 늑막염을 앓던 그는 몇 주 동안 누워 있다가 거의 죽을 뻔했는데, 이때 항간에는 소피아가 국왕에게 [[동맹국]]으로 참전할 것을 강요하다가 칼로 찔렀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처럼 소피아는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 1915년 6월, 베니젤로스파는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곧 베니젤로스는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불가리아 왕국]]이 그리스의 국경인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하자 그는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끊임없이 참전하라고 종용했고, 결국 국왕은 방어를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이후 그리스에서는 [[동맹국]]에 유리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국왕 부부는 [[협상국]]으로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1916년에는 타토이 궁전을 둘러싼 숲에 원인 모를 불이 나서 막내 에카테리니 공주를 간신히 구한 적도 있었다. 이 일이 일어난 이후 그리스 왕실은 독일과 더욱 가까워졌으며, 소피아 또한 협상국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암살 위협으로 인해 [[독일 제국]]의 황제인 오빠 [[빌헬름 2세]]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1916년 10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테살로니키]]에 대립 정부를 세우고 [[협상국]]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를 국론 분열이라 한다.] 한편 프랑스-영국 군대가 [[아테네]]를 압박하자 식량의 공급이 어려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소피아는 자선 활동에 더욱 전념하며 식량과 약, 옷 등을 배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프랑스 군대는 궁전을 폭격하기 시작했고 소피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실로 피신했다. === 망명 === 1917년 [[니콜라이 2세]]가 폐위당하자 [[콘스탄티노스 1세]] 또한 지지 세력을 잃었다. [[협상국]]의 위원장이었던 찰스 조나트는 그리스 정부에 콘스탄티노스 1세를 폐위시키고 [[요르요스 2세|요르요스 왕세자]]가 아닌 다른 왕자를 왕위에 세울 것을 건의했다.[* 요르요스 왕세자 또한 친독이었기 때문이었다.] 협상국의 침략이 두려웠던 콘스탄티노스 1세는 차남 [[알렉산드로스(그리스)|알렉산드로스 왕자]]에게 왕위를 내주고 궁전을 떠났다.[* 소피아는 이 때 알렉산드로스 왕자를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1세와 소피아, 그리고 다섯 아이들은 [[스위스]]에 정착했다. 하지만 악화된 왕실의 재정상태와 망명 등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1918년에는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을 뻔했다. 한편 그리스에 홀로 남겨진 [[알렉산드로스(그리스)|알렉산드로스]]는 정부의 방해로 망명한 가족들과 전혀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알렉산드로스가 외국의 공주가 아닌 그리스의 귀족 아스파시아 마노스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국왕 부부와 정부는 모두 심히 실망했다. 소피아는 아스파시아의 신분이 높지 않은 것을 언짢아 했던 반면 정부 측에서는 [[영국]]과 가까워질 기회를 잃게 되어 아쉬워 했다. === 말년과 사망 === 1919년 그리스-터키 전쟁이 발발하고 [[알렉산드로스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베니젤로스의 권력이 약화되어 그리스 왕족은 잠시 [[아테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터키 독립전쟁|그리스-터키 전쟁]]에서 패하자 혁명파들은 콘스탄디노스 1세에게 장남 [[요르요스 2세]]에게 양위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스 왕족들은 다시 망명길에 올라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1년 후 남편 [[콘스탄티노스 1세|콘스탄디노스 1세]]가 사망했고, 조피는 여생을 [[독일]]에서 보내다 1932년 [[암]]으로 사망했다. == [[호엔촐레른 가문|가족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호엔촐레른 가문)] === 조상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프로이센]]의 조피[br]{{{-2 (Princess Sophia[br]of Prussia)}}} ||<|6>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br]{{{-2 (Frederick III)}}} ||<|3> [[빌헬름 1세]][br]{{{-2 (Wilhelm I)}}} ||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br]{{{-2 (Frederick William III)}}}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여공작 루이제]][br]{{{-2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 ||<|3>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공녀 아우구스타]][br]{{{-2 (Princess Augusta[br]of Saxe-Weimar-Eisenach)}}} || || 작센바이마르아이젠나흐 대공[br]카를 프리드리히[br]{{{-2 (Charles Frederick,[br]Grand Duke of Saxe-Weimar-Eisenach)}}} || ||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러시아 제국의 여대공 마리야 파블로브나]][br]{{{-2 (Grand Duchess Maria Pavlovna of Russia)}}}[* [[파벨 1세]]의 3녀이다.] || ||<|7>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br]{{{-2 (Victoria,[br]Princess Royal)}}} || ||<|3> [[앨버트 공|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br]{{{-2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 || [[에른스트 1세|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br]{{{-2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즈[br]{{{-2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 ||<|3> [[빅토리아 여왕]][br]{{{-2 (Victoria)}}} || ||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br]{{{-2 (Prince Edward,[br]Duke of Kent and Strathearn)}}}[* [[조지 3세]]의 4남이다.]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br]{{{-2 (Princess Victoria[br]of Saxe-Coburg and Saalfeld)}}}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남''' || [[요르요스 2세]][br]{{{-2 (George II)}}} || [[1890년]] [[7월 19일]] || [[1947년]] [[4월 1일]] || --[[루마니아]]의 엘리사베트[* [[페르디난드 1세]]의 장녀이다.]-- || || '''2남''' || [[알렉산드로스 1세|알렉산드로스]][br]{{{-2 (Alexander)}}} || [[1893년]] [[8월 1일]] || [[1920년]] [[10월 25일]] || 아스파시아 마노스[br]슬하 1녀[*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유고슬라비아의 왕비 알렉산드라]]] || || '''1녀''' ||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루마니아의 왕대비 엘레나]][br]{{{-2 (Helen, Queen Mother of Romania)}}} || [[1896년]] [[5월 2일]] || [[1982년]] [[11월 28일]] || --[[카롤 2세]]--[br]슬하 1남[* [[미하이 1세]]] || || '''3남''' || [[파블로스 1세|파블로스]][br]{{{-2 (Paul)}}} || [[1901년]] [[12월 14일]] || [[1964년]] [[3월 6일]] || [[프리데리케 루이제|하노버의 프리데리케]][* [[빌헬름 2세]]의 외손녀이다.][br]슬하 1남 2녀[*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스페인의 왕비 소피아]], [[콘스탄티노스 2세]] 등] || || '''2녀''' || 아오스타 공작부인 이레네 공주[br]{{{-2 (Princess Irene, Duchess of Aosta)}}} || [[1904년]] [[2월 13일]] || [[1974년]] [[4월 15일]] || [[토미슬라브 2세|아오스타 공작 아이모네]][* [[아마데오 1세]]의 손자이다.][br]슬하 1남 || || '''3녀''' || 에카테리니 공주[br]{{{-2 (Princess Katherine)}}} || [[1913년]] [[5월 4일]] || [[2007년]] [[10월 2일]] || 리처드 브랜드램[br]슬하 1남 || [[분류:1870년 출생]][[분류:1932년 사망]][[분류:그리스 왕비]][[분류:프로이센의 공주]][[분류:덴마크의 왕자비]][[분류:호엔촐레른 가문]][[분류:글뤽스부르크 가문(그리스)]][[분류:포츠담 출신 인물]][[분류:암으로 죽은 인물]][[분류:왕대비]][[분류:타토이 왕실 묘지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