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94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슈투름압타일룽/인물]][[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질서경찰/인물]][[분류:자살한 나치 관련자]][[분류:나치당원]][[분류:스트라스부르 출신 인물]] [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프리드리히-빌헬름 크뤼거.jpg|width=100%]]}}}|||| ||<#666> {{{#FFF 이름}}} ||'''Friedrich Wilhelm Krüger'''[br]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뤼거|| ||<|2><#666> {{{#FFF 출생}}} ||[[1894년]] [[5월 8일]]|| ||[[독일제국|독일국]]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br](現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 ||<|2><#666> {{{#FFF 사망}}} ||[[1945년]] [[5월 10일]] (향년 51세)||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br][[오버외스터라이히]]주 에겔스베르크 || ||<#666> {{{#FFF 가족}}} ||형: [[발터 크뤼거]][*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계급)|대장]]] || ||<#666> {{{#FFF 복무}}} ||[[독일제국군]] [br] [[슈츠슈타펠]] (1931년, 1935년 ~ 1945년) || ||<#666> {{{#FFF 최종계급}}} ||[[슈투름압타일룽]] [[대장(계급)|대장]] (상급집단지도자) [br]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계급)|대장]] (상급집단지도자) [br] [[질서경찰]] [[대장(계급)|대장]] || ||<#666> {{{#FFF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제2차 세계 대전]] || ||<#666> {{{#FFF 주요 서훈}}} ||[[철십자 훈장|기사십자 철십자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크뤼거.jpg|width=100%]] || [[파일:크뤼거2.jpg|width=100%]] || [* 왼쪽은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오른쪽은 돌격대 상급집단지도자 사진이다.] [[나치 독일]]의 [[SA|돌격대]] 및 [[슈츠슈타펠|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무장친위대]] 및 [[질서경찰]] [[대장(계급)|대장]]으로 많은 [[학살]]을 저지른 [[전범]]이다. [[슈츠슈타펠]] [[지휘관]]이지만 전선에서만 활동하며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던[* 전투부대는 시간이 지나면 신병 받고 재충전하기 위해 후방으로 빠지고 다른 부대가 투입되는데, 발터 크뤼거는 그 시기가 올 때마다 다른 전투부대로 뺑뺑이 돌려졌다. 전투를 안 하는 부대로 간 적도 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급해지면 바로 들어가야 하는 예비대에 떨어졌기 때문.] 형 [[발터 크뤼거]]와 달리 [[유대인]] 학살을 벌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 == 초기 행적 ==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대령이던 알프레트 크뤼거의 [[차남]]으로 [[독일 제국]] 땅이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는 처음에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중간에 자퇴 후 칼스루에의 유년사관학교에 입교해 다시 프로이센 고급유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 [[제1차 세계 대전]] == [[1914년]]에 [[독일 제국군]] [[소위]]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프리드리히는 세 차례의 부상을 입고 용맹히 싸워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패전 후 잠시 군에 남아 해군의 프리기함네서 근무하다가 뤼처의 의용군에 참가하기도 했다. == [[나치당]] 활동 == [[1920년]]부터 [[베를린]]의 폐기물 처리업체에서 일한 프리드리히는 [[1924년]]부터 이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1928년]]에 독립업체를 세워 개업했는데 [[1922년]]에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으며 그리고 세 아이의 수양아버지가 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일한 폐기물 처리업체는 [[쿠르트 달루게]]도 엔지니어로 근무하여 두 사람은 서로 알게 되어 [[1929년]] [[11월]]에 프리드리히는 권유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1년]] [[2월]]에 친위대에도 입대했지만 [[1931년]] [[4월]]에 돌격대로 이동했다. 이것은 프리드리히보다 앞서 입단한 달루게가 당시 [[베를린]]의 돌격대 지도자였기에 그를 빼내 간 것이었다. [[1932년]]에 돌격대 소장으로 승진한 프리드리히는 [[에른스트 룀]]의 측근이 되었다. [[1933년]] [[6월]]에는 돌격대 최고위인 돌격대 대장으로 승진하여 직업훈련소와 돌격대 사관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긴 장검의 밤 사건으로 룀을 포함한 많은 돌격대 간부가 숙청되었지만 프리드리히는 체포를 면했다. 돌격대의 지위는 유지되었지만 룀의 숙청 후 후임이 된 빅토르 루체에 의해 돌격대 제복의 착용은 금지되어 일시 당내에서 직무를 상실한 프리드리히는 [[1935년]] [[1월]]에 총통이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다시 친위대로 이적하도록 명령되어 계급도 친위대 대장이 되었다. [[1936년]]에 국경경비 책임자가 된 프리드리히는 [[나치당]]의 여러가지 이벤트에 히틀러의 대리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 === [[전쟁범죄]] ===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후인 [[1939년]] [[10월 4일]]에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의 로즈지구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로 임명된 프리드리히는 [[10월 9일]]에는 오스트 지구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로 재부임했다. 그리고 폴란드 총독이던 [[한스 프랑크]]에게서도 보안담당 차관직을 받았다.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폴란드에서 실시된 [[유대인]]의 대학살을 비롯해 수많은 나치[[전범]] 행위에 가담했다. 재직중이던 [[1942년]] [[4월 20일]]에 폭탄테러로 인한 암살시도도 있었지만 무사했다. 허나 [[1943년]] [[11월]]에 폴란드 총독이던 [[한스 프랑크]]와 불화하여 친위대 지도자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1943년]] [[11월]]부터 [[1944년]] [[4월]]까지 제 7 SS 의용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에 배속된 프리드리히는 독일 지배하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치안유지 활동에 종사했다. 여기서도 현지인의 학살에 관여하여 악명을 떨쳤는데 [[1944년]] [[6월]]부터 [[8월]]까지 [[핀란드]] 북부에서 제 6 SS 산악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다. [[1944년]] [[8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제 5 산악사단의 사령관이 된 프리드리히는 [[1945년]] [[2월]]부터 독일 남동지구 전선에서 힘러의 대리인으로 일했다. === 패전과 최후 === [[1945년]] [[4월]]부터 [[5월]]에는 [[오스트리아]]에서 남방군 집단에 속한 경찰 치안부대의 지휘를 맡았지만 독일이 항복하자 패전을 깨닫고 프리드리히는 자결했다. 그의 형인 [[발터 크뤼거]]도 [[5월 22일]]에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