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83D8B 0%, #4682B4 20%, #4682B4 80%, #483D8B)" {{{#FFFFFF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헬레니즘)] [include(틀:이집트의 역사)] [include(틀:키프로스의 역사)] [include(틀:고대 이집트의 역사)] [include(틀:고대 이집트 관련 문서)] ---- }}}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83D8B 0%, #4682B4 20%, #4682B4 80%, #483D8B)" {{{#FFFFFF {{{+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r]'''Δυναστεία των Πτολεμαίων'''[br]'''Αἴγυπτος[* 코이네 그리스어로 에귑토스, 즉 이집트.]'''}}}}}} || ||<-6>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5183.png|width=100%]]}}} || ||<-6><:> {{{#000,#ddd {{{-1 기원전 24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최대 강역.[* 실선 부분은 [[클레오파트라 7세]] 즉위 직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쇠락하면서 잃어버린 영토들이다.]}}}}}} || ||<-6><:> '''{{{#fff 기원전 305년 ~ 기원전 30년 }}}''' || ||<#4682B4><-2> '''{{{#fff 성립 이전}}}''' ||<#4682B4> '''{{{#fff 멸망 이후}}}''' || ||<-2><#000000> '''[[헬레니즘 제국|{{{#e5bc00 헬레니즘 제국}}}]]''' ||<#9f0807> '''[[로마 공화국|{{{#fbe673 로마 공화국}}}]]''' || || {{{#fff '''위치'''}}} ||<-2>[[북아프리카]], [[이집트]] || || '''[[수도(행정구역)|{{{#fff 수도}}}]]''' ||<-2>[[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 || || {{{#fff '''국가 원수'''}}} ||<-2>[[파라오]] || || {{{#fff '''정치 체제'''}}} ||<-2>[[전제군주제]], [[제정일치]] || || {{{#fff '''주요 파라오'''}}} ||<-2>[[프톨레마이오스 1세]][br][[프톨레마이오스 3세]][br][[클레오파트라 7세]][br][[프톨레마이오스 15세]] || || {{{#fff '''종교'''}}} ||<-2>[[그리스 로마 신화|그리스 다신교]][br][[이집트 신화|이집트 다신교]][br][[유대교]] 등 || || {{{#fff '''민족'''}}} ||<-2>[[그리스인]], [[이집트인]] || || {{{#fff '''인구'''}}} ||<-2>490만 ~ 750만 명 (기원전 150년) || || {{{#fff '''언어'''}}} ||<-2>[[코이네 그리스어]] {{{-2 (국어)}}}, 민중 이집트어, [[아람어]] || || {{{#fff '''통화'''}}} ||<-2>[[드라크마]](Τετράδραχμο) || ||||<#4682B4>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83D8B 0%, #4682B4 20%, #4682B4 80%, #483D8B)" {{{#FFFFFF '''언어별 명칭'''}}}}}} || ||<#4682B4> [[한국어|{{{#fff 한국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4682B4> [[라틴어|{{{#fff 라틴어}}}]] ||Regnum Ptolemaicum || ||<#4682B4> [[그리스어|{{{#fff 그리스어}}}]] ||Δυναστεία των Πτολεμαίων || ||<#4682B4> [[코이네 그리스어|{{{#fff 코이네 그리스어}}}]] ||Πτολεμαϊκὴ βασιλεία || ||<#4682B4> [[영어|{{{#fff 영어}}}]] ||Ptolemaic dynasty || ||<#4682B4> [[히브리어|{{{#fff 히브리어}}}]] ||מצרים התלמיית || ||<#4682B4> [[아랍어|{{{#fff 아랍어}}}]] ||المملكة البطلمية || [목차] [clearfix] == 개요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기원전 323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지배한 [[마케도니아]] [[왕조]].[* 프톨레메오스 왕조라고도 읽는다. 코이네 발음에선 ai가 ㅐ로 발음되는 현상이 있다. 당대에 쓰이던게 코이네 발음인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이쪽이 맞는 발음이겠으나 관용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라는 고전 발음이 쓰이고 있다. ] 초대왕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고 마지막 왕은 [[클레오파트라]] 7세이다. 국력이 강성할 때는 키레나이카를 비롯한 동부 [[리비아]], [[누비아]], [[팔레스타인]], [[아나톨리아]] 남쪽 해안을 차지하여 명실상부한 동부 지중해의 지배자였다. [[나일]] 델타 지역에 건설한 신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는데, 경제, 학술,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이자 고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대도시였다. 하지만 [[라이벌]]인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잦은 전쟁, 소수의 이민족 특권 계급이 지배하는 기형적 지배 구조 때문에 군사력이 급속히 쇠약해져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다가 결국 [[로마 제국]](당시에는 공화정)의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합병당했다. 시조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아버지인 라고스의 이름을 따서 라고스 왕조(Lagid Dynasty)라고도 한다. '고대 이집트 제32왕조'라고도 부른다. [[이집트/역사|이집트의 역사]]에서 군주가 '[[파라오]]'라는 칭호를 쓴 마지막 왕조이기도 하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죽음으로 이집트를 공식적으로 지배하게 된 로마 황제들이나 로마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 이슬람 제국, 파티마 왕조,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등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계통의 국가들,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삼은 대영제국은 이전에 이집트를 지배했던 외국의 군주들과는 달리 지배자의 호칭으로 파라오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리스인|유럽인]]에 의해 세워지고 [[라틴|유럽인]]에 의해 무너진 왕조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이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가 낳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유바 2세]]와 결혼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프톨레마이오스(마우레타니아)|프톨레마이오스]]를 통해 왕조의 방계가 마우레타니아 왕국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역사|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역사)] [[파일:필라이 이집트 2.jpg]] [[이시스]]를 모셨던 [[필라에 신전]]의 전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지어졌다. == 정치/사회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나 [[박트리아]] 같은 다른 헬레니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그리스]]-[[마케도니아]] [[엘리트]]와 군대가 다수의 [[바르바로이]]를 지배하는 통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세부적인 양상은 꽤 달랐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차지한 이집트는 폐쇄적인 지형과 더불어 기원전 305년 당시를 기준으로 해도 수천 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와 전통 문화를 가진 땅이었다. 게다가 이집트의 전통적 지배 계급인 사제 계급은 전임자인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 정책 덕택에 존속하여 토착 사회에서 막강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Ptolemy_VI_Philometor_ring.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Ring_with_engraved_portrait_of_Ptolemy_VI_Philometor_%283rd%E2%80%932nd_century_BCE%29_-_2009.jpg]] 두 금판 모두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를 묘사한 것이다. 전자는 헬레니즘 지도자로서의 모습, 후자는 이집트 [[파라오]]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성공적인 통치를 위해 토착 문화와 종교를 보다 우호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집트의 신들에게 경배하고 거대한 신전들을 지어 주며 사제 계급과도 손을 잡았다. 대중 앞에 나설 때는 항상 고대 [[파라오]]들의 복식을 갖추었으며, 심지어 전통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2세 이후 모든 왕들이 누이들과 [[근친혼]]을 했다.[* 이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의 왕들은 유전적 문제가 생겨 대개 허약하고 단명했으며 자손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왕조 말기는 피비린내나는 정치적 혼란과 암투의 연속으로 제 명에 죽기 힘든 환경이었던 탓에 속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마케도니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 바르바로이와 그 문화에 대한 거부감까지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했다. 왕조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결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불리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인의 것이었고 그들은 알렉산드리아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리기보다 '이집트 옆의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리는 것을 택했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의 오랜 역사와 문화는 존중했으나 이집트인은 경멸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평생 이집트인에 대해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 몇 안되는 언급 중 하나가 바로 이집트인은 강도와 같다는 평이었다. 모든 텍스트는 이집트 문자가 아니라 그리스 문자로 처리되었다. 대부분의 정책은 그리스인에게 이집트인이 굴복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스 혈통의 유입이 줄어들어들어도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 문화에 젖어있는 것을 택했다. 그리스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기관이 존재했으며 이는 이집트인을 배제하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또한 역대 왕들 중 토착 이집트어를 할 줄 알았던 사람이 [[클레오파트라 7세]]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단면을 보여준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의 전통 중 가장 철저히 모방했던 것은 예속민에 대한 착취였을 것이다. 예로부터 이집트는 비옥하고 풍요롭기로 유명한 땅이었고, [[지중해]] 동부 일대를 장악하여 엄격한 국가 통제 아래 교역도 활발히 했으므로 부유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지경이었다. 재무장관의 지위가 높아 재무장관=재상이었다.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서반구 최대의 대도시이자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이 있는 만큼 학술과 예술, 헬레니즘 문화의 [[메카]]이기도 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왕조 내내 소수 특권계급으로 남았으나,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거주하며 이집트인들과 통혼하여 혼혈 집단을 만들기도 했고, 헬레니즘식 교육을 받은 토착 이집트인들도 늘어났다. 또한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그리스-마케도니아 군인들에게 각지의 땅을 주어 정착시켜서 예비 군사력으로 삼았다. [[셀레우코스 왕조]]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런 정착 군인들을 카토이코이(Katoikoi) 혹은 클레루코이(Klerouchoi)라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군대의 주력인 [[팔랑크스|팔랑기타이]]로 복무했다. 그리스의 유입 인구가 줄어들자 그 대신 [[갈라티아]]의 [[켈트]] 병사들과 같은 여러 [[용병]]들을 적극 유치, 정착시켰다. 클레루코이들과 마찬가지로 땅을 주어 정착시켰는데, 그 땅(파윰 분지)엔 아직도 켈트 혈통의 후손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한 재원은 이집트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충당했다. 심지어 이집트 현지인이나 이집트 혼혈들은 마키모이란 별개의 군단으로 편성되어 전열도 다르게 배치하고 봉급도 10분의 1에서 20분의 1에 달할 정도의 차별을 받았다. 당시 군대에 대한 인식이 시민으로서의 특권이었음을 감안하면 이집트 혈통은 피가 섞였단 사실만으로도 대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왕조에 유입되는 그리스인 인구가 거의 단절되고 용병 고용에도 한계가 찾아오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사력은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거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시도때도 없는 전쟁은 그 한정된 병력 자원마저 빠르게 소모시켰다. 나중에는 도저히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하여 [[라피아 전투]] 때처럼 이집트 병사들을 대거 훈련시키거나 이집트인들을 클레루코이에 받아들이는 등의 시도도 있었지만, 이미 불신과 반발심이 팽배하여 그다지 좋은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만약 승리한다면 승리에 공을 세운 이집트 병사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고, 이를 그냥 받아들여 주면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의 배타적 권력 독점에 차질이 생긴다. 실제로 라피아 전투에서 팔랑크스의 주력이 된 이집트 병사들이 분전하여 승리를 거뒀지만, 승전 후 독립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상술한 "20년에 걸친 반란"의 원인이다. 애초부터 피지배층과 유리되어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은 강력한 군사력이 사라지자 빠르게 통치력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왕조 말기의 내분과 암투,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착취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기 수십 년 전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막대한 부를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생명연장의 꿈]]을 이뤄주지는 못했다. == 문화 == 시리아에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역사|이집트의 역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가장 큰 의의는 찬란한 헬레니즘 문화를 길러내고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이 헬레니즘 문화는 이집트의 풍요로움에 힘입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막장이 돼 가는 와중에도 계속 번영하여 [[로마 제국]] 시대까지 이어졌고, [[동로마 제국]] 초창기 제국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중 한 곳이 되게 해 주었다. [[이슬람]]의 발흥 이후 중세 이슬람 세계의 찬란한 번영 역시 헬레니즘 문화를 그 근간으로 한 것이다. 이집트 고대 문자 해석의 단서로 유명해진 [[로제타 석]]이 만들어진 것이 이 왕조 시대이다. 왕조 특성상 이집트 문자와 함께 그리스 문자를 기록하였는데, 그 덕택에 이집트 문자 해석의 결정적인 돌파구가 생긴 것이다. 또 행정과 기록을 위해 대량의 [[파피루스]]가 사용되었는데, 후대에도 남은 것이 많아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중부 이집트, 특히 파윰 지방엔 파피루스 조각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미라]]의 관을 채우기 위해 재활용된 것인데, 주로 하급 관료들의 휴지통으로 들어간 공문서들이다. 공식 서한, 청원서, 소환장, 증언 녹취록, 재판 기록 등등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단 그리스어 파피루스가 3만여 개인데 이집트 민용 문자는 2천 개에 불과하므로 이 기록들만 가지고 이집트의 행정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상당히 복잡하고 발전된 행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이집트인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착취했다는 소리도 된다.[* 파라오가 이집트의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전통 아래에서 인민의 착취는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상술했다시피 교역도 엄격한 국가 통제하에 두려고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교역의 수익은 대부분 왕조에 바치는 세금으로 귀결되었다. 그나마 셀레우코스 왕조는 동방 지역에 많은 도시들을 건설하거나 자치권을 주기라도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에서 그야말로 세금만 바득바득 긁어갔다. == 역대 군주 == [include(틀:역대 이집트 파라오)] [[파일:05_ptolemid.jpg]] 이름 뒤의 숫자는 후대 역사가들이 임의로 붙인 것이다. 당대에는 프톨레마이오스 다음에 오는 별명으로 구분했다. 별명의 뜻은 비고 란의 큰따옴표를 참고. || 이름 || 재위 기간 || 배우자 || 비고 || ||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 기원전 305 - 기원전 285 || [[베레니케 1세]][* 네번째 부인. 첫번째 부인은 타이스, 두번째 부인은 페르시아 귀족인 아르타카마, 세번째 부인은 디아도코이 중 하나인 안티파트로스의 딸인 에우뤼디케.] || "구원자" || ||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 기원전 285 - 기원전 246 || [[아르시노에 2세]][* 두번째 부인이자 누이. 근친혼 전통의 시작이다. 첫번째 부인인 [[아르시노에 1세]]는 디아도코이 중 하나인 뤼시마코스의 딸이며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친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이혼당했다.] || "형제를 사랑하는 자" || ||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 || 기원전 246 - 기원전 221 || [[베레니케 2세]] || "후원자" || ||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 기원전 221 - 기원전 203 || [[아르시노에 3세]] ||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 || ||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 기원전 203 - 기원전 181 || [[클레오파트라 1세]] || "신의 현신" || ||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 || 기원전 181 - 기원전 164 || [[클레오파트라 2세]] ||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 1차 재위 || ||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 || 기원전 170 - 기원전 163 || - || 1차 재위, 형과 내분 || ||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 || 기원전 163 - 기원전 145 || [[클레오파트라 2세]] || 2차 재위 || || [[프톨레마이오스 7세]] 네오스 필로파토르[*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어린 아들. 위에도 나오지만 삼촌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살해당했다.] || || || || ||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 || 기원전 145 - 기원전 116 || [[클레오파트라 2세]][* 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 즉 조카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결혼했다. 기원전 131년 클레오파트라 2세가 반란을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하나, 기원전 127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 의해 클레오파트라2세가 실각하고 시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기원전 124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는 화해한다.] || 2차 재위 || || [[클레오파트라 2세]] || 기원전 131 - 기원전 127 || || || || [[클레오파트라 3세]] || 기원전 116 - 기원전 101 || 공동 통치[* 기원전 116-기원전 107년까지는 큰아들 [[프톨레마이오스 9세]], 기원전 107-기원전 101년까지는 작은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0세] || || ||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티로스(소테르 2세) || 기원전 116 - 기원전 107(기원전 88 - 기원전 81) || [[클레오파트라 4세]][* 기원전 115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1세]]와 재혼] || ||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 || 기원전 107 - 기원전 88 || [[베레니케 3세]] || || || [[베레니케 3세]] || 기원전 81 - 80[* 아버지가 죽고 재혼 전까지 단독 통치] || || || ||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알렉산드로스 2세 || 기원전 80 || [[베레니케 3세]][* 결혼하고 며칠 뒤 살해했으나 며칠 못 가 그도 살해당했다.] || || ||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네오스 디오뉘소스(아울레테스) || 기원전 80 - 기원전 58 || [[클레오파트라 5세]] || || || [[베레니케 4세]] || 기원전 58 - 기원전 55 || 공동 통치[* [[클레오파트라 6세]](기원전 58 - 기원전 57)] || || ||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네오스 디오뉘소스(아울레테스) || 기원전 55 - 기원전 51 || || || || [[클레오파트라 7세|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 기원전 51 - 기원전 30 || 공동 통치[*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토르(기원전 51 - 기원전 47), [[아르시노에 4세]](기원전 48 - 기원전 47), [[프톨레마이오스 14세]](기원전 47 - 기원전 44), [[프톨레마이오스 15세]](기원전 44 - 기원전 30)] || 해당 항목 참고 || 특이하게도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아르시노에 2세]]를 시작으로 부부가 대부분 공동 통치를 했다. 역사가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의 흉상들을 보고 유전적으로 갑상선기능항진증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많은 흉상이 눈이 돌출되어 있고 목이 두꺼운 편인데, 이것은 다 갑상선기능항진증의 증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대부분 다 살이 찐 편으로 보이는데, 갑상선기능항진증이 있는 사람들은 살이 잘 안 찌기 때문에 논란이 있는 편이다. [[분류:프톨레마이오스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