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로마 집정관]][[분류:520년 사망]][[분류:6세기 집정관]][[분류:살해된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6세기)] ---- || '''이름''' || 플라비우스 비탈리아누스[br]([[라틴어]]: Flavius Vitalianus, [[그리스어]]: Βιταλιανός) || || '''출생''' || 미상 || || '''사망''' || [[520년]] [[7월]] || || '''직위''' || [[트라키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집정관]] || || '''반란 대상''' || [[아나스타시우스 1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 [[레오 왕조]]의 반란자.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가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를 폐기하고 [[단성론]]을 정식 교리로 삼으려들자 513년 [[트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2년만에 진압당했다. == 생애 == 하부 모이시아의 잘다파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고트족]] 또는 [[스키타이]] 출신 장성이었다고 하며, 어머니는 51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마케도니우스 2세의 누이였다고 한다. 그는 키가 작고 말을 더듬었지만, 무척 용맹하고 군략도 출중했다고 한다. 503년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활약하였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513년 무렵엔 트라키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역임했다. 511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자신이 신봉하는 [[단성론]]을 정식 교리로 삼기로 작정하고, [[칼케돈 공의회]]를 무효화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마케도니우스 2세를 파면하고 단성론자를 주교로 선임했다. 이에 칼케돈 교리를 신봉하는 [[녹색당과 청색당|녹색당]]이 격하게 반발하였고, 51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봉기를 일으켜 거리를 행진했다. 그들은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아레오빈두스]] 장군을 황제로 추대하려 했지만, 아레오빈두스가 잠적해버려서 무위에 그쳤다. 513년, 비탈리아누스는 트라키아의 군대를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그는 정통 교리를 수호하겠다고 선전하여 트라키아는 물론이고 모이시아, 스키티아 속주로부터 지지를 받아냈고, 주민들도 기꺼이 지원했다. 그 결과, 그의 병력은 삽시간에 5만~6만 명에 달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이에 맞서 자신의 문양이 새겨진 청동 십자가를 성벽에 설치하라고 명령했고, 비티니아와 아시아 속주가 반란에 가담하는 걸 막기 위해 세금을 감면했다. 비탈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뒤 헤도몬 교회에 진을 치고 도시의 육지 부분을 봉쇄했다. 비탈리아누스는 협상을 청하는 아나스타시우스의 사신에게 칼케돈 정교회 회복과 트라키아 군대의 불만 해결이 자신의 목표라고 밝혔다. 아나스타시우스는 협상을 위해 그와 부하들을 초청했다. 비탈리아누스는 자기가 가는 건 거절했지만, 부하들을 대신 보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그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병사들의 불만이 해결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또한 종교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교황|로마 총대주교]]에게 제출하겠다고 서약하였다. 반란군 진영으로 돌아온 후, 장교들은 아나스타시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게다가 수도를 공략할 방도가 없었기에, 비탈리아누스는 모이시아로 후퇴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뒤통수|키릴을 트라키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하여 비탈리아누스를 공격하게 했다.]] 양측은 몇 차례 접전을 벌였는데, 비탈리아누스가 야밤에 오데수스로 이동하던 적군을 매수하였고, 키릴은 자기 집에서 살해당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다시 [[훈족]] 출신의 알라타르를 [[이이제이|트라키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하여 비탈리아누스를 치게 했다.]] 비탈리아누스는 이들을 격퇴했고, 알라타르는 513년 가을 오데수스로 후퇴했다. 여기에 비탈리아누스의 함대가 흑해 연안의 아크리스를 급습하여 타격을 입혔다. 비탈리아누스는 추종자들에게 전리품을 골고루 나눠줬고, 아직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모이시아와 스키타이의 남은 도시들이 항복했다. 그는 514년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였는데, 이번에는 200척의 함대를 규합하여 보스포루스 강을 따라 남하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칼케돈 주교들을 복위시키고, 그를 트라키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하며, 공의회를 개최하여 [[단성론]] 금지를 표명하겠으며, 5천 파운드 상당의 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비탈리아누스는 약속을 믿고 돌아갔다. 황제는 단성론 포기를 공식 선언했지만,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공의회는 무산되었고 주교들도 복귀하지 못했다.]] 515년 말, 비탈리아누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아나스타시우스를 응징하기 위해 또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그는 황금 뿔을 가로질러 갈라타 교외를 점령하고 그곳에 진을 쳤다. 이에 마리누스가 이끄는 제국군 함대가 출격하여 황금 뿔 입구에서 반란군 함대를 섬멸했다. 마리우스는 뒤이어 갈라타에 상륙한 뒤 반란군을 격퇴했고, 비탈리아누스는 야밤을 틈타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는 북부 트라키아에 들어간 뒤 군대를 해산하고 잠적하였고, 측근들은 체포되어 모조리 처형당했다. 518년 7월 [[유스티누스 1세]]가 즉위했다. 그는 그때까지 숨어 있던 비탈리아누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비탈리아누스가 초청을 빋아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오자, 유스티누스는 그를 명예 집정관에 임명하고 뒤이어 파트리키우스에 선임했다. 비탈리아누스는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화해를 주도했다. 519년에 교황 사절단을 수도로 호송하기도 했다. 520년에는 루스티키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520년 7월, 그는 잠재적인 후계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궁전에서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