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83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프랑스 총리]][[분류:프랑스 내무장관]][[분류:프랑스의 남성 정치인]][[분류:비시 프랑스/인물]][[분류:퓌드돔 출신 인물]][[분류:타임지 올해의 인물]][[분류:총살형된 인물]] [include(틀:역대 프랑스 총리)]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color: #23235A" '''{{{#23235A 피에르 라발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타임지 올해의 인물/1930년대)]}}}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fff 0%, #ffffff 20%, #ffffff 80%, #ffffff)" '''[[프랑스 총리|{{{#000092 프랑스 제51대 총리}}}]][br]{{{#000092 {{{+1 피에르 장 마리 라발}}}[br]Pierre Jean Marie Laval}}}'''}}}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462px-Pierre_Laval_a_Meurisse_1931.jpg|width=100%]]}}} || ||<|2> '''출생''' ||[[1883년]] [[6월 28일]]||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샤텔동|| ||<|2> '''사망''' ||[[1945년]] [[10월 15일]] (향년 62세) ||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프랑스]] [[일드프랑스]] [[발드마른|발드마른 주]] 프렌|| ||<|3> '''재임기간''' ||<(>제51대 총리|| ||<(>[[1931년]] [[1월 27일]] ~ [[1932년]] [[2월 20일]] ^^1기^^|| ||<(>[[1935년]] [[6월 7일]] ~ [[1936년]] [[1월 24일]] ^^2기^^|| || '''가족''' ||배우자 잔 클라우사[* Jeanne Claussat, [[1888년]] [[11월 19일]] ~ [[1959년]] [[12월 10일]]][br]딸 조제 라발[* Josée Laval, [[1911년]] [[4월 2일]] ~ [[1992년]] [[1월 9일]]]|| || '''직업''' ||정치인|| || '''정당''' ||[include(틀:사회당(프랑스))] (1914년 ~ 1923년)[br][include(틀:무소속)] (1923년 ~ 1945년)|| || '''서명''' ||<-2>{{{#!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Signature_de_Pierre_Laval_-_Archives_nationales_(France).png|width=150]]}}}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의 정치인.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나치 독일 치하의 [[비시 프랑스]]에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 생애 == 1883년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지방의 샤텔톤에서 카페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 때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졌으나 법학으로 진로를 바꿔 변호사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라발은 [[사회주의자]]였지만, 1차대전의 참상과 [[볼셰비키]]의 발흥을 본 후 보수주의자로 전향해 정계에 입문했다. 그 후 보수파의 지지를 받고 1930년대엔 세 번에 걸쳐 프랑스의 총리직을 연임했으며, 타임지에서는 라발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할 정도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4년 당시 라발은 외무장관인 루이 바르투가 암살되자 13대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 내각의 후임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및 이탈리아와 [[스트레사 전선]]을 체결했지만 영국이 프랑스를 불신해 단독으로 독일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2달만에 실패했고, 협상의 실패가 언론에 알려짐에 따라 라발은 사임해야 했다. 2차대전이 일어난 후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가 참패하자 라발은 페탱의 뒤를 따라 총리로 다시 취임했고 적극적인 대독협력정책과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해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라발은 [[루프트바페]]의 군용기를 타고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샤를 드골]]은 [[프란시스코 프랑코|프랑코]]에게 라발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결국 그는 프랑스로 다시 끌려와 프레즈니 교도소에 수용된다. 1945년 10월 5일 라발의 재판이 개정되었다. 라발은 이미 [[필리프 페탱]]이 드골에게 은전을 입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내심 그렇게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페탱과는 달리 라발은 그 누구도 그를 살려줄 마음이 없었다. 페탱은 무엇보다 1차 대전의 구국 영웅이었으며 친독 행위도 라발에 비해서 프랑스의 이익을 보호하는 면이 있었기에 지지자도 많고, 동정여론도 많았다. 하지만 라발은 좌와 우를 막론하고 철저한 매국노로 국민적 여론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이 개정되었을 시 변호인들이 출석하지 않았다.[* 이때 변호인들은 서한을 보냈는데,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가 재판을 선거 전에 종결시키기 위해 너무 서두르기 때문에 자료를 모을 수가 없어 출석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검사는 이런 변호인들의 불만에 대해 이 사건은 자료조사나 기록검토가 필요없는 사안이며, 피고에 대한 범죄기록은 1940년 6월 이후 백일하에 드러나 있다고 일축했다.] 그 후 변호인단이 출석했으나 재판과정을 주시할 뿐 직접 변론에 나서지 않아 라발은 사실상 자신을 혼자서 변호해야 했다. 재판부는 라발이 [[비시 정부]]를 히틀러에게 팔아먹기 위해 광분한 민족반역자라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감방이 좁다고 불평하면서 재판부에게 항의와 불평의 목소리를 높인다는 발언이 나오자, 라발은 "내가 바로 진짜 애국자"라고 도발적인 태도를 취해 결국 퇴장명령을 받아야 했다. 3일째 되는 재판 날 라발은 묵비권을 행사해 출석하지 않았고, 그래서 재판이 피고인의 출석 없이 진행되었다. 재판장과 검사는 피고의 출석이 없이도 재판을 계속할 수 있다고 결정했고 10월 9일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10월 15일 사형 당일날 라발은 평소 소지하던 [[청산가리]]를 삼켜 자살을 기도했지만 곧 주위에 발견되어 [[위세척]]을 당한 후 깨어나 자살은 미수에 그쳤다. 그는 사형대의 앞에 서서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먼저 판사들에게 말한다. 그들은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범한 자들이다. 나는 조국을 너무 사랑한 죄로 죽는다". 그리고 변호인들이 마지막 포옹을 하자 "나는 당신들을 보면서 최후의 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병사들에게 시선을 주며 [[유언|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 나는 비겁하게 죽기 싫다. 나의 심장을 쏘아라. 당신들은 역사상 최대 범죄의 공범들이다."''' 1945년 10월 15일 낮 12시 30분 그는 사형당했다. 62세의 나이였다. == 참고자료 == *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 [[주섭일]]. 사회와 연대(2004) == 매체에서 == * [[전간기]]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를 다룬 [[Hearts of Iron IV]]에서는 게임 시작 시점의 프랑스의 지도자로 나오는데, 중점 국민연합 재건을 채택하면 피에르 라발이 계속 지도자로 있게 된다. 이후 파시즘 루트를 탈 시 잠시 파시즘 정당의 지도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