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ierre_Cambronne.jpg|width=200]] 피에르 자크 에티엔 캉브론 Pierre Jacques Étienne Cambronne 1770~1842 [목차] [clearfix] == 개요 ==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복무한 [[프랑스군]] 장교. == 경력 == [[1792년]]에 [[척탄병]]에 자원하여 [[아일랜드]] 침공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고 1799년에 [[중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대령으로 진급하고 1810년에 제3근위 자원병 [[연대장]]이 되었으며 동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스페인]], [[러시아]],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 나폴레옹의 주요 전역에 참전하였으며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1814년에는 [[황제]] 근위대 소장으로 발탁되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엘바 섬 유배 당시에 그와 동행했다.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당시 나폴레옹과 함께 탈출하였으며 [[워털루 전투]]에 참전하였다. == [[워털루 전투]] == 워털루 전투가 프랑스의 패배로 완전히 굳어질 무렵, 캉브론은 마지막으로 항전하고 있던 소수의 [[프랑스 제국 근위대#s-3.1.1|고참 근위대(Vieille Garde)]]를 지휘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프랑스]]군의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느낀 [[영국군]] 지휘관 중 한 명인 콜빌 장군이 프랑스군의 방진에 항복을 권유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루즈망이라는 신문기자가 전한 바에 따르면 그는 이때 "근위대는 죽을 수는 있어도 항복하지는 않는다!(La garde meurt mais ne se rend pas!)"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말은 매우 유명해졌으며, 나중에 낭트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을 때 그 명판에도 이 말이 새겨졌다. 위키에 따르면 이 말은 다른 근위대 장교인 클로드에티엔 미셸(Claude-Etienne Michel)이 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는 워털루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다른 버전에 따르면, 이때 캉브론이 한 말은 '''"그대 질문에 다섯 글자로 대답하겠다. [[똥|M.E.R.D.E.]]"''', 혹은 더 직접적이고 단말마적인 "Merde!"였다고 한다. Merde는 [[프랑스어]]로 '똥'이라는 뜻으로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프랑스 욕. 영어의 Shit과 그 의미가 통한다. [[한국]] 욕으로는 "[[좆까]]", 원문을 살려(?) 직역하면 [[똥이나 처먹어|똥이나 쳐먹어라!]]쯤 된다.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만 [[아르덴 대공세#s-4.3|바스토뉴 공방전]]의 일화와 비슷하다. [[파일:HugMis2_38.jpg]] 이 이야기 역시 나름대로 널리 퍼졌으며, 특히 문호 [[빅토르 위고]]가 자기 소설 [[레 미제라블]]의 제2부 첫머리에서 워털루 전투를 묘사했을 때도 이 버전을 채택했다. 위고는 이 한 마디를 가리켜 '''프랑스인이 한 말 가운데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했다.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영화 [[워털루]]도 이 버전을 택했다. 여튼 항복을 거부한 고참 근위대에 대한 [[영국군]]의 대답은, "쏴라!"였다. '''정작 캉브론 자신은 이 와중에서 살아남았다.''' == 워털루 이후 == 나폴레옹이 쫓겨나고 왕당파가 정권을 잡자 캉브론은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그는 워털루 전투 이후 그를 간호했던 [[스코틀랜드]] 출신 간호사와 결혼하였으며, 루이 18세 치하에서 [[육군]]에 계속 복무했다. 은퇴한 후에는 고향인 낭트로 돌아가 거기서 살다 1842년에 죽었다. [[분류:나폴레옹 전쟁/군인]] [[분류:프랑스의 군인]] [[분류:1770년 출생]] [[분류:1842년 사망]] [[분류:루아르아틀랑티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