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로동당 평안남도 당위원장]][[분류:조선로동당 4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조선로동당 5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1921년 출생]][[분류:1998년 사망]][[분류:애국렬사릉 안장자]] [목차] == 개요 == [[북한]]의 [[정치인]], 농업 테크노크라트. == 생애 == [[1921년]] [[5월 9일]]에 출생했다. [[함경북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젊어서 농민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적이 있으며 이후 남[[만주]]로 넘어가서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고 한다. [[8.15 해방]] 이후 [[1950년]] 5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부 서기를 맡았으며 [[1956년]] 5월에 당중앙위원회 부부장에 올랐다. [[1958년]] 3월, 전 [[평안남도]] 당위원장 [[김만금]]이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농업부장에 임명됨에 따라 후임 평남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리을설]] 회고에 따르면 [[김일성]]의 삼촌 [[김형록]]에게 아부한다고 아주 호화로운 집을 지어줬는데, 김일성이 사람들이 수상 특권으로 과거 지주네 집보다 더 좋은 집을 지어서 사는 걸로 알지 않겠냐고 불같이 화를 내서 허물어버리고 그 자리에 국수집을 세워버렸다 카더라. [[1961년]] 9월, [[조선로동당 제4차대회|4차 당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에 리민수에게 평남 당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1967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내각]] 국영 과수총국장을 지냈음이 확인되었으며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4년 11월, 같은 농업 테크노크라트인 [[김만금]]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은퇴했는지 [[1985년]] 9월, 농업과학원 부원장으로 물러났다. [[탈북자]] 소스에 따르면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검찰소|중앙검찰소]] 초급 당비서를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1998년]] [[10월 21일]]에 사망했다. [[김정일]] 시대 초기를 뒤흔든 [[심화조 사건]]에 휘말려서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문이 무성한데 박문일의 증언에 따르면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된 1단계 [[숙청]] 때 김기선, 림형구와 함께 김정일 암살기도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었다고 한다. 현재는 복권이 됐는지 [[애국렬사릉]]에 농업과학원 부원장의 명의로 시신이 안장되었다. 심화조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었다는 반대급부인지 [[김정은]] 시대에 나온 북한 소설에도 등장한다. [[태영호]] 증언에 따르면 그의 사위는 외교관이었는데 장인이 처형되면서 같이 끌려들어가서 고문을 당하다가 복권되어서 [[말레이시아]] 대사까지 승진했다고 한다. 주 말레이시아 북한 대사는 [[1998년]] 12월에 임명된 인물은 김자룡, [[2003년]] 3월에 임명된 인물은 김원호이다. == 참고문헌 ==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서울: 기파랑, 2018). * (最新) 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