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383b40 20%, #000000)" {{{#FFFFFF '''필 스펙터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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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프로듀서'''와 '''살인마'''라는 양면적인 면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듀서이자 인물으로 평가받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절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 생애 == [[1939년]],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10살 때 아버지의 자살 이후 [[LA]]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대]] 말, [[고등학교]]를 다니던 도중 [[테디 베이즈]]라는 그룹을 결성해 음악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테디 베어즈는 필 스펙터가 작곡한 싱글 '[[To Know Him is to Love Him]]'[* 이후 [[낸시 시나트라]]도 커버하게 되는 곡이다.][* [[비틀즈]]도 이 곡을 커버했는데, 제목과 가사를 Her로 바꿔 불렀다.]을 히트시킨 뒤 해체되었고, 필 스펙터는 [[프로듀서]]/[[작곡가]]로 전업했다. [[1960년]] 초반, 여러 뮤지션들의 프로듀서/작곡가로 작업하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한 그는 녹음 방식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 일명 소리의 벽)''''를 창시하게 된다. '월 오브 사운드'는 다양한 소리들을 쌓아 풍성한 하나의 소리로 창출하는 음향 기법을 말하는데, 그는 이를 통해 기존의 단순한 팝과는 다른 소리를 창출해냈다. 이 방식은 후일 [[1960년대]] 록 명반들을 비롯해 지금의 음향 기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 방식을 자신의 레코드사인 [[필리 레코드]]에 소속된 뮤지션들에게 써먹어 큰 히트를 기록했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로네츠]][* 심지어 해체 이후 스펙터는 로네츠 리더와 결혼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게 누가봐도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아래에 두려는 꼼수가 보이는 행위였다. 베로니카 베넷에 따르면 필 스펙터가 꾸준히 [[시민 케인]]을 보여주며 "나 없이는 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압박했다고 한다. 로네츠는 베넷 자매와 사촌 네드라 텔리로 이뤄진 그룹이었는데, 언니 에스텔도 정신병으로 한동안 노숙자 생활하고 말년에는 쓸쓸히 죽는 등 베넷 자매 모두 해체 후 불행하게 살아갔다.]다. 로네츠를 비롯하여 다수의 걸그룹들과 뮤지션들을 프로듀싱하며 무수한 히트곡을 내놓았으며, 그 중 다수는 필 스펙터가 직접 작곡하였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직전, [[미국]]에서 잠깐이지만 걸그룹 붐이 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이 되면서 그의 방식은 점점 구식으로 취급받게 되고, 결국 [[1966년]] 그는 결혼과 더불어 일시적으로 은퇴하게 된다. [[1969년]], 복귀한 그는 예전 명성 때문에 [[비틀즈]] 쪽에 관여하게 되는데, 그가 처음으로 손을 댄 비틀즈 계열 음반인 [[Let It Be]]는 강박적일 정도로 [[오케스트라]]와 [[오버더빙]]을 떡칠해놓은 음반이 되었다. 이는 라이브 음원 특유의 생동감을 살리려던 [[폴 매카트니]]의 반발을 샀지만, 폴과 사이가 나쁠대로 나빴던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은 [[반대 심리|반발 심리]]로 그의 편을 들어주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비틀즈 해체 이후 그는 그들의 솔로 앨범 프로듀싱을 담당했다. 다만, [[존 레논]]의 솔로 작업들은 '이게 필 스펙터의 프로듀싱인가?'싶을 정도로 거칠고 날 것의 사운드를 들려줬다. 그 외 [[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등 쟁쟁한 뮤지션들의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전의 카리스마적 행보 보다는 못해도 이렇게 [[1970년대]]에도 그럭저럭 경력을 이어가나 싶었지만, [[1973년]] [[존 레논]]의 '[[Rock 'n' Roll]]' 제작 도중 레논과 마찰이 생겨 퇴출당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이혼]]과 [[교통사고]]까지 겹치게 되자 일시적인 휴지 기간을 가지게 된다. 다시 복귀한 [[1977년]] [[레너드 코헨]]과 [[1980년]] [[라몬즈]]의 앨범 프로듀서로 초빙되었다. 또한, 이 시절 [[오노 요코]]의 앨범에도 참여했다. 특히, 라몬즈의 음악 활동에 관여하면서 라몬즈는 이전보다 더욱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고, 필 스펙터가 작곡/프로듀싱한 걸그룹들의 두왑 곡들을 커버하는 등[* [[Baby, I Love You]]] 넓어진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에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으나, 현재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라몬즈 역시 인터뷰에서 스펙터와의 불화를 폭로하는 등[* 강박적으로 리테이크를 내서 멤버들을 지치게 만든데다, 디디와 조니는 스펙터가 총 들고 협박했다고 밝혔다. 마키는 이들에 비해 견딜만 했는지 (본인은 같은 [[뉴욕]] 출신이라 이해했다고 코멘트.) 협박 건에 대해 정반대의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작업 스타일이 너무 달랐다는 것은 인정했다.] 쉽지 않았던 작업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이렇다 할 별다른 재기를 하지 못하고, 잠수 상태에 있다가 [[2003년]] [[스타세일러]]의 [[Silence is Easy]] 작업에 참여했으나, 실제로 밴드와 함께한 곡은 겨우 두 곡에 불과했다. 히트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 사생활 및 살인 사건 === 위에서도 언급되긴 하지만, 사생활은 그야말로 시궁창이었다. 우선 두번째 부인인 [[로네츠]]의 베로니카 베넷[* 결혼 후 [[로니 스펙터]](Ronnie Spector)로 개명했다.]과는 간통으로 시작했으며,[* 심지어 로니는 초창기에는 스펙터가 결혼한 줄도 몰랐다고 한다. 스펙터의 첫번째 부인 아네트 메라도 걸그룹 스펙터스 쓰리의 멤버였는데, 스펙터의 레이블 명의도 이 사람에게서 따왔다. 스펙터는 아네트하고 [[1966년]]에 이혼했고, 2년 후인 [[1968년]]에 베넷과 재혼했다.] 가정 폭력을 일삼았다. 심지어 베넷은 보다 못해 어머니의 도움으로 집에서 도망쳤고, 이혼 소송 도중 스펙터는 베넷을 살인청부업자에게 의뢰해 죽이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결국 베넷은 수입과 [[양육권]]을 포기해야 했다. 다행히 베넷과 다른 로네츠 멤버들이 힘을 모아 소송을 걸었고, 10년 투쟁 끝에 [[1999년]] 일부나마 로열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베넷은 [[1982년]] 매니저 조나단 그린필드랑 결혼해 자식도 낳고 평생 같이 살다가 [[2022년]] [[1월 12일]], 암으로 타계했다. 그 후, 혼자서의 생활을 이어나갔지만, 26살 여성과 3번째 결혼을 했다가 [[2016년]] 이혼했다. 친자식 이외에도 입양아(아들)도 있었는데, 베넷에게 했던 쓰레기같은 짓을 저지른 [[막장부모]]였다. [[학대]] 뿐만 아니라, 스펙터의 여자친구랑 해야했다고 [[양자]]들이 폭로하기도 했다. [[인성]]과 관련이 없지만, 친자식 중 외아들은 9살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2003년]], [[스타세일러]] 작업과 동시에 터진 [[라나 클락슨]] 살해 사건은 필 스펙터를 영원히 매장당하게 만들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미국판 [[조형기]] 사건. [[라나 클락슨]][* [[스카페이스(1983)|스카페이스]]에서 혀를 낼름낼름거리는 매니의 뺨을 친 여자(...), 리치몬드 대소동의 미세스 바르가스랑, [[소드 앤 소서리]] 장르 영화에서 좀 알려져 있었다. 그 외에는 TV와 B급 영화에서 활동했던 배우. 스펙터하고는 일하고 있던 [[라이브하우스]]에서 만났다고 알려졌는데, 실제로 30대부터 배우 커리어가 잘 안 풀려서 사망 당시 라이브하우스에서 투잡을 뛰었다고 한다.]이라는 여배우하고 자신의 집에서 싸우다가 총을 쏘아 그녀를 살해했는데, 문제는 그 뒤 자살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나는 바람에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 총을 들고 집을 나서면서 "--시발--... 내가 그 --년--을 쏴버렸어..."라 말하면서 나갔다고 가정부와 운전사가 증언했다. 한마디로 안하느니 만도 못한 거짓말을 한 셈. 총에 스펙터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119 신고 당시 녹음 증거랑 이전부터 총 들고 여자들에게 협박했다는 증언이 겹쳐서 확정되었다. 여기다 스펙터가 변론으로 내세운 반박 주장도 '''"클락슨은 자살했다"'''라서 전혀 먹히지 않았다.] 사실 그 전부터 음악계에서 성격이 [[사이코패스|사이코패스]][* 실제로도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같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기정사실화되었다. 결국 타살 혐의가 밝혀지면서 그는 체포되었다. [[2009년]], [[종신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2025년]] 이후 [[가석방]]이 가능하지만, 나이를 생각해보면 살아서 나올 리는 만무하다. 결국 이 사건은 대중음악계 최대의 '''[[흑역사]]''' 중 하나로 꼽히게 생겼다. [[로만 폴란스키]]의 아동 강간과 더불어, 훌륭한 예술가가 반드시 훌륭한 인격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명예를 누리던 사람의 말년이 이렇게 한 순간에 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씁쓸한 사례다. 사실 예전에 스펙터의 전성기인 [[1960년대]] 초에 그에게 아이디어 절도범이라고 비난을 할 정도로 경쟁 관계에 있던 [[조 믹]][* 영국 최초의 빌보드 차트 1위 곡인 [[Telstar]](뮤즈의 앨범 [[Black Holes and Revelations]]의 Knights Of Cydonia 내용 참고)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유명하다. 락계의 괴인 [[스크리밍 로드 서치]]의 대표곡 [[잭 더 리퍼]]도 그가 프로듀싱한 곡이다.]도 비슷한 정신병을 앓았으며, [[1967년]]에 자기가 세를 들던 집주인을 총으로 사살하고 본인도 자살을 했다. === 수감 및 사망 === 수감 이후 감옥 안에서 잘 지낸다고 알려졌다. 매년마다 찍는 머그샷 사진이 하나같이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나왔던 추측. 다만, 머리가 풍성했던 위 사진과는 달리 머리가 죄다 빠졌다.[* 사실 젊은 시절부터 가발을 썼을 정도로 탈모가 심했다. 맨 위의 사진을 보면 휑하다.] 내심 [[2025년]] 이후부터 가능할 가석방을 노릴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강 상태는 수감 생활로 나빠졌는지 [[2013년]]부터 교도소 의료 시설에 수감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더니 [[2014년]] [[후두유두종]]으로 (왜곡된 의미가 아닌) [[실어증]]에 걸렸다고 알려졌다. [[2020년]] [[12월]], [[코로나19]]에 걸렸다고 밝혀졌으며, 결국 현지 시각으로 [[2021년]] [[1월 17일]] 사망했다. [[https://consequenceofsound.net/2021/01/phil-spector-dead/|향년 81세.]] 부검 결과 사인 자체는 [[자연사]]이나, 스펙터의 딸은 코로나19 합병증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타계 당시 대중은 그의 죽음을 무시하고 비난했으며, 음악계 반응도 재능은 안타깝지만 애도는 '''안/못 하겠다'''로 요약할 수 있다. [[배철수]]조차 타계 이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음악은 잘 했지만, 삶이 쓰레기라서 추모는 못하겠다"라고 디스했을 정도. [[그레이엄 콕슨]]은 트위터에 추도 트윗으로 스펙터의 사진을 올렸다가 격한 반발을 받고 본인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삭제했다. 그가 얼마나 민심을 잃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음악적 평가 == 그의 전과나 폭력적인 성격과는 별개로 그의 '''소리의 벽(Wall of Sounds)'''기법만큼은 수많은 음향 기술자들과 후배 뮤지션들에게 추앙받고 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동시에 모든 밴드의 악기를 녹음해서 이를 [[믹싱]]하는 정도에 그쳤던 프로듀싱 작업은 소리의 벽 기법이 생긴 이후로 보다 정교하고 실험적인 소리를 음악에 담을 수 있도록 진화했으며, 이러한 기법은 추후 '''모든 대중음악 스튜디오의 기본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특히 동시대의 밴드 [[비치 보이스]]에게 미친 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 예시로 이들의 대표작 '''[[Pet Sounds]]'''의 이름은 ''''''필 스펙터의 이름 스펠링을 놓고 [[역두문자어]]로 지어낸 것''''''이라고한다.하지만, 이건 브라이언 윌슨 주장이고, 다른 멤버들 주장과는 다르다.지금의 팝 음악 역시 월 오브 사운드의 후계자들이라 해도 무방하다.[* 비치 보이즈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뮤지션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바로 필 스펙터와 폴 매카트니다.] '스튜디오를 실험실 삼아 악곡에 보다 풍성한 소리를 담아내는' 음악가(혹은 프로듀서)의 시초이며, 이후 [[비치 보이스]]나 [[비틀즈]]가 그것을 이어받았다고 보면 좋다. 프로듀서로서 뿐만이 아니라 '[[Da Doo Ron Ron]][* 걸그룹 크리스탈스(The Crystals)의 [[1963년]] 곡. [[1977년]]에 나온 숀 캐시디(Shaun Cassidy)의 버전도 유명하다.]', '[[Be My Baby(로네츠)|Be My Baby]]', '[[You've Lost That Lovin' Feelin']]'[* 'Unchained Melody' 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라이쳐스 브라더스 (The Righteous Brothers)의 곡.]', 'River Deep, Mountain High' 등의 명곡을 작곡한 송라이터로서도 재능을 발휘한, 여러모로 대중 음악계의 살아있던 전설이었다. '''10대들의 타이쿤'''이라는 칭호까지 있었을 정도. 그가 프로듀싱한 앨범 중 가장 평가가 좋은 것은 [[캐럴]] 앨범 '[[A Christmas Gift for You from Phil Spector]]'다. 이 앨범은 캐롤의 [[고전]]으로 불리고 있으며, [[롤링 스톤]]이 선정한 '25대 크리스마스 명반'에서 1위로 뽑히기도 했다.[[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the-25-greatest-christmas-albums-of-all-time-148740/|#]] 또한, [[조지 해리슨]]의 최고작인 '[[All Things Must Pass]]'도 이 사람이 프로듀싱했다. 사실 전통적인 뮤지션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한마디로 '''자신만의 솔로 작업/앨범'''이 없다. 그의 디스코그래피 크레딧 대부분은 철저히 프로듀서/작곡자로 채워져 있다.] 그 천재적인 프로듀싱/송라이팅 감각으로 록 음악사에 이름을 올린 조금 독특한 케이스다. == 여담 == * [[소아성애자]]에다가 [[강간]]을 즐기는 악취미를 가졌다. * 악행으로 인하여 [[정준영]]이나 [[고영욱]]처럼 음악계를 포함한 대중들에게 금지어로 올랐다. * 이런저런 악행 때문에 최근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과 로큰롤 명예의 전당자리에 박탈을 당했으며, 기록도 말소되었다. [[분류:필 스펙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