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프랑스 국왕(카페 왕조))] ---- || '''{{{#002395 장 1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나바라 국왕)]}}}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0%, #fff 20%, #fff 80%, #ececec)" '''프랑스 카페 왕조 제14대 국왕[br]{{{+1 필리프 5세}}}[br]Philippe V'''}}}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Philippe V.jpg|width=100%]]}}} || ||<|2> '''출생''' ||[[1292년]]|| ||프랑스 왕국 리옹 || ||<|2> '''사망''' ||[[1322년]] [[1월 3일]] (향년 29세)|| ||프랑스 왕국 롱샹 || ||<|2>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316년]] [[11월 20일]] ~ [[1322년]] [[1월 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가문''' ||[[카페 왕조|카페 가문]] || || '''아버지''' ||[[필리프 4세]] || || '''어머니''' ||[[호아나 1세]] || || '''형제자매''' ||마르그리트, [[루이 10세]], 블랑슈, [[샤를 4세]], [[프랑스의 이자벨|이자벨]], 로베르 || || '''배우자'''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 부르고뉴 백작 오토 4세의 장녀이자 [[샤를 4세]]의 첫번째 아내 블랑슈의 언니다.] || || '''자녀''' ||잔, 마르가리트, 이사벨, 블랑슈 || || '''종교''' ||[[가톨릭]] || || '''별칭''' ||장신왕 (Le Long/The Tall) ||}}}}}}}}}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제14대 왕. '미남왕' [[필리프 4세]]의 [[차남]]으로 제12대 왕 [[루이 10세]]의 동생이자, 나바르(나바라)의 여왕 [[호아나 2세]](잔느)와 제13대 왕인 '유아왕' [[장 1세]]의 숙부였다. 프랑스 왕으로는 '필리프 5세', [[나바르]] 왕으로는 '펠리페 2세'였다. == 생애 == 형 [[루이 10세]]가 테니스를 치다가 포도주를 마시고 3일 만에 사망하면서 필리프가 [[섭정]]이 되었는데, 유복자로 태어난 조카 [[장 1세]]마저 태어난지 5일 만에 요절하면서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전개되었다. 루이 10세에게 남은 호적상 유일한 자녀였던 잔느에게 귀족들의 지지가 몰렸지만 필리프 5세는 그녀의 모후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가 루이 10세에 의해 [[간통]]죄로 쫓겨났던 시기에 잔느가 태어났다며 혈통에 의문을 제기했다.[* 참고로 친아버지로 의심받는 필리프 드 오네이(당연히 필리프 4세에게 마르그리트와의 간통이 걸려 교수척장분지형으로 처형당했다.)는 필리프의 왕자 시절 시종으로 친한 친구 사이였던 것으로 의심된다.] 더불어 1317년 파리 대학 법학자들과의 회의를 통해 [[프랑크 왕국]]의 토지 상속법이었던 《[[살리카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확대 해석했다. 《살리카법》은 모계 계승이 불가능하다고 되어 있었지만 외손자는 계승이 가능했다. 《살리카법》의 본래 의미는 여성의 경우, 기사로서 병역의 의무를 다할 수 없으나 외손자일 경우, 전쟁에 나갈 수 있으니 상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살리카법》은 몇백년 전에 사문화된 법률이었다. 아들까지 갈 것 없이 남편과 공동 즉위한다면 병역의 의무를 남편이 지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리프 5세는 《살리카법》을 확대 해석하여 외손자는 물론 아예 모계 계승 자체를 막아버렸다. 즉, 여성은 왕위에 오를 수 없는 것으로 못을 박아 잔느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카페 왕조 이후의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에서는 [[여왕]]이 즉위하지 못했으며, 프랑스 역사에서 여왕이 한 번도 즉위하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이 어거지 확대 해석은 그 후《살리카법》자체가 없었던 [[신성 로마 제국]][* 다만 신성 로마 황제의 경우엔 선출직인데다 여성의 출마를 금지하고 있었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으로 점점 퍼져 나가 훗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https://blog.naver.com/iceman123456/222681250604|#]] 잔느는 비록 프랑스의 여왕이 되지 못했으나 나바라에서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아, 숙부들인 필리프 5세와 [[샤를 4세]]가 죽고, 카페 왕조의 본가가 단절되자 1328년 나바라의 여왕 [[호아나 2세]]로 즉위했다. 필리프 5세는 비록 어거지로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이 되었지만 그때 이용한 《살리카법》이 불과 몇년 후 [[백년전쟁]]을 발발시켜 프랑스 전역을 기나긴 전쟁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필리프 5세는 즉위한 지 6년 만에 2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딸 넷은 장성했으나, 아들 필리프는 태어난 지 1년 만인 1317년에 사망하여 후계자가 없었다. 장성한 딸이 넷이나 되었으니 후계자는 충분했지만 '''[[자승자박|스스로 이용한 《살리카법》 때문에 그들은 즉위할 수 없었다.]]''' 필리프 5세의 후손은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의 후손[* 루이 10세의 아들 [[장 1세]]는 태어난 지 5일만에 죽었고, 샤를 4세의 외동딸은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들 중 유일하게 단절되지 않은 혈통이었다. 유일하게 후손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차녀 마르그리트의 후계는[* 필리프 5세의 장녀 잔느는 부르고뉴 가문에 시집갔으나 외아들이 22세에 요절해 혈통이 단절되었고, 3녀 이자벨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손녀사위인 [[부르고뉴국|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호담공' 필리프 2세의 후손으로 이어지며, '용담공' 샤를이 로렌(로트링겐, 로타링기아)의 왕이 되어 서프랑크는 아니지만 중프랑크의 왕이 되나 싶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고 결국 [[펠리페 1세]] 대에서야 에스파냐의 왕위를 획득하게 된다.[* 프랑스 카페 왕조 제14대 왕 필리프 5세- 부르고뉴 백작부인 마르그리트 1세(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와 혼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 플랑드르의 여백작 마르그리트 3세(카페-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와 초혼,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2세와 재혼)- [[부르고뉴국]]의 '용맹공' 장 1세- [[선량공 필리프|부르고뉴국의 '선량공' 필리프 3세]]- 부르고뉴국의 '용담공' 샤를 1세- [[마리 드 부르고뉴|부르고뉴국의 '부귀공' 마리]](합스부르크 황실의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 '미남왕' [[펠리페 1세]]를 거쳐 8촌 운손 대에서야 마침내 타국에서나마 왕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참고로 펠리페 1세의 장남이 그 유명한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계 합스부르크 왕조]]의 초대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였다.] [[분류:프랑스 국왕]][[분류:나바라 국왕]][[분류:카페 가문]][[분류:1292년 출생]][[분류:1322년 사망]][[분류:리옹 출신 인물]][[분류:왕위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