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황실회의)] [[파일:809f6e7a.jpg]] [* 옆에 있는 사람은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이다.] [목차] == 개요 == 마사히토 친왕비 하나코(正仁親王妃華子). [[1940년]] [[7월 19일]]생(만 [age(1940-07-19)]세). [[일본]]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의 차남이자 2남 5녀 중 6번째 자녀인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의 아내([[친왕비]])이다. 즉 [[아키히토]] 상황에게는 제수, [[미치코 상황후]]에게는 아랫동서, [[나루히토|나루히토 덴노]]와 [[후미히토]] 친왕, [[구로다 사야코]]에게는 작은어머니, [[마사코 황후]]와 [[키코 비|키코 친왕비]]에게는 시숙모, [[마코 공주]], [[카코 공주]], [[아이코 공주]], [[히사히토]] 친왕에게는 작은할머니가 된다. 일본[[적십자사]], 일본이케바나예술협회, 일본동물복지협회, 일본[[승마]]연맹, 일본[[라틴아메리카]]부인협회의 명예총재를 맡고 있다. == 친정 및 성장 배경 == 츠가루 요시타카(津輕義孝) [[백작]]과 모리 히사코(毛利久子)의 4녀(막내)로 태어났다. 본래 아버지 요시타카는 오와리 도쿠가와(尾張德川) 가문에서 분가한 도쿠가와 요시쿠미(德川義恕) [[남작]]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외가인 츠가루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놓이자 외가로 입적되어 외가의 성씨와 작위([[백작]])를 계승했다. 어머니 히사코는 [[조슈 번]] 모리 가문의 지번인 조후 번(長府藩)[* 군인 [[노기 마레스케]]가 이 지역 출신이다.]의 번주 모리 모토오(毛利元雄) [[자작(작위)|자작]]의 장녀이다. 이렇게 하나코는 친가와 외가로부터 모두 [[화족]]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하나코는 전통적 황족ㆍ화족 학교인 [[가쿠슈인]]에 다녔으며,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 現 [[가쿠슈인]] 여자대학] 문과(영어 전공)를 졸업했다. 시숙모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와는 7촌간이며, 넷째 시누이 [[이케다 아츠코]]의 남편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는 6촌간이다. 아츠코는 하나코의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이케다 아츠코]]도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 문과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가정생활과로 전과하여 졸업했다.] 하나코가 5살 때인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으며 큰 혼란을 겪었다. [[국가신토|신격화되어 오던]] [[천황]]과 그 일족은 [[인간선언]]을 했고, 2년 후인 1947년에는 [[신적강하]]가 일어났다.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모조리 평민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화족이었던 하나코의 친가와 외가도 이때 평민이 되었다. 그러나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높디 높은 콧대는, 하루아침에 낮아지지 않았다. == 친왕비로 간택되다 == [[1964년]] [[9월 30일]], 만 24세의 츠가루 하나코는 5살 연상의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친왕과 결혼했다. 결혼으로 인해 마사히토 친왕은 태어나서 줄곧 써 오던 [[어칭호]] '요시노미야' 대신 '히타치노미야'라는 [[미야고]](궁호)를 받아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이 되었고, 츠가루 하나코도 남편을 따라 '마사히토 친왕비 하나코(正仁親王妃華子)'가 되었다. 하나코가 황실의 비(妃)로 선택된 이유는, 혈통 때문이었다.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작은며느리는 [[화족]] 가문 출신으로 직접 고른 것이었다. 하나코 비가 [[화족]] 출신에 [[가쿠슈인]] 졸업생인 반면,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의 친정 쇼다(正田) 가문은 대[[재벌]][*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제일 큰 제분회사라고도 한다.]이지만 평민이다.[*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후]]의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화족]]([[백작]])이었지만, 친가인 쇼다 가문은 평민이다.]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는 [[가톨릭]] [[미션스쿨]]인 [[세이신여자대학]]을 졸업했다. 평민 출신이며 [[가쿠슈인]] 졸업생도 아닌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마 아랫동서 하나코 비와 비교당하며 더욱 괄시를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는 평생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한 것으로 유명한데, 하나코 비의 남편 [[마사히토]] 친왕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마사히토 친왕은 [[그리스도교]]에도 관심을 가져[*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한 적도 있다.], [[가톨릭]] 집안 출신이며 가톨릭 [[미션스쿨]]을 졸업한 형수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당연히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시어른들에게 알려져, 미치코 황태자비만 또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는 것이다.[* [[일본 황실]]의 [[종교]]는 [[신토]]이기 때문에, 며느리가 타 종교에 대해 믿거나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시집살이 구실이 될 수 있었다.] === 황실 가계도 === [include(틀:일본 황실 가계도)] == 아이를 낳지 못하다 == 그러나 하나코 비는 평생 [[임신]]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남편 [[마사히토]] 친왕의 문제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손윗동서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는 이미 하나코가 황실로 시집오기 전, 1960년 2월 23일에 이미 황태손 격[* [[일본 황실]]에 공식적으로 '황태손'이라는 직함은 있지만 황태자가 없을 시에만 황태손으로 책봉된다. [[나루히토]] 친왕은 만 31살인 1991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을 낳았다. 1965년에는 둘째 [[후미히토|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을, 1969년에는 셋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낳아 총 2남 1녀를 두었다. 그러니 [[마사히토]] 친왕과 하나코 비 부부가 결혼 후 [[쇼와]] 시대였던 1960년대나 1970년대, 또는 늦어도 1980년대 초반기 즈음에 아들이나 딸 등 자녀를 [[출산]]하였다고 해도,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 부부를 앞질러 [[일본 황실]] 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을지는 불확실하다. 장남이자 천황 승계 서열 1위에 [[황태자]] 지위를 갖고 있던 [[아키히토]]와 달리, [[마사히토]]는 차남에다가 쇼와 시대였던 1960~80년대 당시에는 천황 승계 서열 2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가 딸만 낳고 하나코 비만이 유일하게 아들을 낳는 상황이 되지 않는 이상, 하나코 비가 남편 [[마사히토]] 친왕과의 사이에서 [[임신]]에 성공해 자녀를 낳았다고 해도, [[나가코 황후]]는 장남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 부부, 차남 마사히토 친왕과 하나코 친왕비 부부 소생의 손주들을 특별히 차별하거나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 [[마사히토]] 친왕은 후계자가 아니긴 하지만,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딸 넷 끝에 어렵게 두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고부갈등]]이 없진 않아 있었을 듯하다. == 현재 == 남편 [[마사히토]] 친왕은 내성적이지만 온화한 성격으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고 있다. 자식 문제와 [[천황]] 승계 문제 등으로 사이가 험악한 조카들인 형 [[나루히토]] 천황 &[[마사코 황후]] 부부와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키코 비]] 부부와 달리, 현 [[아키히토]] 상황&[[미치코 상황후]] 부부와 마사히토 친왕&하나코 친왕비 부부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편이라고 한다. [[쇼와 덴노]]가 살아 있었던 시절까지는 자식 문제와 아내들의 출신 성분 문제로 인하여 두 사람간의 사이가 미묘하긴 했었으나, 쇼와 덴노가 1989년 사망하고 아키히토 황태자가 새 일본 천황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어느 정도 많이 좋아진 편이라고 한다. [[황실전범]] 상 [[양자(가족)|양자]]를 [[입양]]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히타치노미야 부부의 반려견에 대한 애정은 사실상 자녀에 버금갈 정도로 각별하다고 한다 이후 [[마사히토]] 친왕은 암 연구를 계속하여, 1969년부터 재단법인 일본 암 연구회 암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2001년 1월부터는 암 연구회 명예총재로 있다. 2018년 들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이 공개 공무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이 상태는 2019년 4월 30일 및 5월 1일 천황 생전 퇴위 및 생전퇴위에 따른 새 천황 즉위 행사,5월 22일 적십자사 행사에서도 유지된 것으로 보아 일시적인 부상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 보도에 의하면 화족 출신답게 예법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라고 하는데, 과거 손윗동서인 [[미치코 상황후]]에 대한 황실 차원에서의 시집살이에 그녀도 어느 정도 관여했을 정도로, 주로 손윗동서의 예법 부분을 지적하면서 이래서 평민은 안 된다고 질타하는 쪽이었다. 그 이후 사이가 회복되긴 했지만 이러한 예법에 민감한 성향은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여전한 모양인지 과거 한 황족들의 모임에서 황족의 예법을 어기고 평범한 여자들처럼 언니 [[마코 공주]]와 대화하던 [[카코 공주]]에게 "황족답게 행동하라"면서 한 마디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카코 공주]]는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황족으로서의 예법을 일절 지키지 않았기에, ~~역시 아키시노노미야~~ 결국 하나코 비는 자녀에게 황족으로서 필요로 하는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않고 방임만 하는 [[후미히토]]나 [[키코 비]]에 대해서도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보도를 할 정도라고 한다. 2019년 9월 황실회의에 참석하는 2명의 황족들을 뽑는 선거에서 [[후미히토]]와 함께 연속해서 담당하는 게 결정되었다. [[분류:일본의 친왕비]][[분류:1940년 출생]][[분류:신주쿠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