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169_adriano_IV.png|height=125]] || || 제168대 [[아나스타시오 4세]] || → ||<#806600> '''{{{#FFF 제169대 하드리아노 4세}}}''' || → || 제170대 [[알렉산데르 3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9A100, #EFBC00 20%, #EFBC00 80%, #D9A100);" '''{{{#670000 제169대 교황[br]{{{+1 하드리아노 4세}}}[br]Hadrianus IV}}}'''}}}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하드리아노4세.jpg|width=100%]]}}}|| || '''교황명''' ||하드리아노 4세 (Hadrianus IV)[* 일부 문서에서는 'Adrianus IV'로도 표기되어 있다.] || || '''본명'''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br](Nicholas Breakspear) || ||<|2> '''출생''' ||[[1100년|1100년경]] || ||[[파일:노르망디 공국 국장.svg|width=25]]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애보츠랭글리 || ||<|2> '''사망''' ||[[1159년]] [[9월 1일]] (58~59세) || ||[[파일:교황령 국기(754-1803).svg|width=25]] [[교황령]] [[라치오|아냐니]] || || '''재위기간''' ||[[1154년]] [[12월 4일]] ~ [[1159년]] [[9월 1일]] || || '''언어별[br]명칭''' ||[[라틴어]]: Hadrianus PP. IV[br][[이탈리아어]]: Papa Adriano IV[br][[영어]]: Pope Adrian IV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169대 [[교황]]. 현재까지 가톨릭교회 역사상 유일한 영국인 교황이다. 만장일치로 새 교황으로 선출된 하드리아노 4세는 우선 [[로마]]의 반교황파의 지도자인 아르놀도를 축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155년 로마 시내에 반교황파로 인한 폭동으로 [[교황청]]의 [[추기경]]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교황은 성지주일[* [[부활절]] 일주일을 앞둔 일요일.] 바로 전날 로마 전역에 교회 업무 전면 중단이라는 강력하고 엄격한 조치를 취하였다. 교회 업무가 중단되면 로마로 찾아드는 순례자 수가 크게 감소해 최종적으로는 도시 경제에 큰 타격이 될 것임이 뻔했기 때문에 [[원로원]]은 즉각 아르놀도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협조를 얻어 추방된 아르놀도를 붙잡은 뒤 처형했고, 이후 로마에 내린 교회 업무 중단 조치를 철회했다. 하드리아노 4세는 서방 교회와 [[정교회|동방 교회]]가 일치하고자 노력을 했으나 순조롭지가 않았다. 교회가 통합하는 것에 대한 조건으로 교황은 당시 동방 교회의 중심 국가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에게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해 주기를 요구했으며, 반면 마누일 1세는 자신의 세속적 권위를 인정해 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의 교회에 두 명의 지도자가 양립할 수 없으므로 하드리아노 4세와 마누일 1세는 모두 상대방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드리아노 4세는 교황이 지닌 권력이 지닌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었고, 마누일 1세의 신하들과 동로마 제국의 백성들은 교회의 황제라고 자처하는 한낱 로마 주교의 권위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친서방 정책의 일환으로 마누일 1세는 서방 교회에 대해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하드리아노 4세는 거리를 두려는 어물쩍거리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교회 일치는 달성하기 힘든 것으로 판명되었고, 두 교회는 계속 분열된 상태로 남게 되었다. 하드리아노 4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1세는 지속적으로 교회를 자신의 통치 아래 예속하려고 시도했고, 하드리아노 4세는 황제보다 교황이 더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하며 프리드리히 1세와 대치하였다. 1157년 10월, [[브장송]]에서 열린 회의에서 교황이 파견한 특사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교황의 서찰을 전했는데, 이 서찰에 적힌 단어 하나가 큰 논란을 일으켰다. 논란을 초래한 단어는 황제에게 수여된 특혜들을 언급한 'beneficia(베네피치아)'인데, 교황 측에서는 이를 '대관식'이라는 뜻으로 썼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법관은 앞뒤 문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봉건적 종속 관계'라고 [[오역|잘못 번역]]을 했던 것. 법관이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도 모른 채 이러한 번역본이 그대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전해지자 교황이 자신을 신하 취급한다고 오해해 분노를 했고, 이 일로 인해 결국 [[교황령]]과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 [[분류:1100년 출생]][[분류:1159년 사망]][[분류:하트퍼드셔주 출신 인물]][[분류:파리 대학교 출신]][[분류:영국인 교황]][[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