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 [[FC 바르셀로나 후베닐 A|{{{#F5F5DC '''FC 바르셀로나 후베닐 A'''}}}]]}}} || ||<-3> {{{#F5F5DC '''Fútbol Club Barcelona Juvenil A'''}}}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aviola-fifa-2019-getty_crop1585948332669.jpg_1902800913.jpg|width=100%]]}}} || ||<-2><:> {{{#F5F5DC ''' 이름 ''' }}} ||<:> {{{#000 {{{+1 '''하비에르 사비올라'''}}}[br]'''Javier Saviola'''}}} || ||<-2><:> {{{#F5F5DC ''' 본명 ''' }}} ||<(> 하비에르 페드로 사비올라 페르난데스[br]Javier Pedro Saviola Fernández || ||<-2><:> {{{#F5F5DC ''' 출생 ''' }}} ||<(> [[1981년]] [[12월 11일]] ([age(1981-12-11)]세) / [br] {{{-1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 ||<-2><:> {{{#F5F5DC ''' 국적 ''' }}} ||<(> [include(틀:국기, 국명=아르헨티나)] || ||<-2><:> {{{#F5F5DC ''' 신체 ''' }}} ||<(>168cm || ||<-2><:> {{{#F5F5DC ''' 직업 ''' }}} ||<(>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br][[축구 감독]] || ||<|2><:> {{{#F5F5DC ''' 소속 ''' }}} ||<:> {{{#F5F5DC ''' 선수 ''' }}} ||<(> '''[[CA 리버 플레이트]] (1998~2001) [br] [[FC 바르셀로나]] (2001~2007)''' [br] {{{-1 → [[AS 모나코 FC]] (2004~2005 / ^^임대^^)}}} [br] {{{-1 → '''[[세비야 FC]] (2005~2006 / ^^임대^^)'''}}} [br] [[레알 마드리드 CF]] (2007~2009) [br] '''[[SL 벤피카]] (2009~2012)''' [br] [[말라가 CF]] (2012~2013) [br] [[올림피아코스 FC]] (2013~2014) [br] [[엘라스 베로나 FC]] (2014~2015) [br] [[CA 리버 플레이트]] (2015~2016) || ||<:> {{{#F5F5DC ''' {{{-1 지도자}}}''' }}} ||<(> FC 오르디노 (2016~2022 / ^^수석 코치^^)[br][[FC 바르셀로나]] 후베닐 A (2022~ / ^^수석 코치^^) || ||<-2><:> {{{#F5F5DC ''' 국가대표 ''' }}} ||39경기 11골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 2000~2007)^^ || [목차] [clearfix] == 개요 ==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 선수 경력 == === 클럽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별명은 토끼(El Conejo). 빠른 주력과 순도 높은 골결정력 덕분에 아르헨티나의 공격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봄직한 포스트 [[디에고 마라도나|마라도나]] 소리를 듣기도 했다. [[2004년]]에는 [[펠레]]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는 [[FIFA 100]]에 최연소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오래 선수생활을 한 덕분에 스페인 국적도 가지고 있다. [[1998년]]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프로로서 첫 신고식을 했다. 2001년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기 전까지 86경기에서 45골을 터트리며 [[디에고 마라도나]] 이후 10대 시절 가장 완성된 기량을 선보인 선수라는 찬사까지 들을 정도로 주목을 받던 그는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 11골[* 여기엔 2번의 [[해트 트릭]]이 포함되어 있다.]을 뽑아내며 득점왕과 MVP를 독식하면서 전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사비올라의 11골은 [[2011년]]까지도 깨지지 않은 U-20 월드컵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그의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후에 이어지는 그의 축구인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렇게 명문구단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는 [[2001년]]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 [[스페인]] [[라리가]]에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3시즌 동안 리그 평균 15골 정도, 시즌 평균 20골 정도를 터트리는 준수한 활약도 바르셀로나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시기의 리그 득점 기록을 살펴보면 '2001-02 시즌 17골(팀내 1위 클루이베르트가 18골)[* 더군다나 아르헨티나를 떠나 유럽에서의 첫 시즌이었다.], 2002-03시즌 13골(팀내 1위 클루이베르트가 19골), 2003-04시즌 14골(팀내 1위 클루이베르트가 15골)' 인데 충분히 자기 몫은 해 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비올라의 입지가 불안정했던 이유는 바로 사비올라의 비교 대상이 다름아닌 '''[[히바우두]]'''였기 때문.[* 또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의 미친 활약이였다. 만약 사비올라가 소위 무명선수 신분에 저런 스텟을 올렸다면 오히려 찬사를 받았겠지만, 당시 사비올라는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의 미친 임팩트로 그 당시엔 [[펠레]], [[마라도나]]의 뒤를 잇는 또 다른 신동이란 찬사까지 받았기 때문에 저 스텟에 성이 차지 않았던 것.] 히바우두가 2001-02 시즌 후 [[AC 밀란]]으로 이적하면서 구단과 서포터들은 새로 들어온 사비올라가 [[히바우두]]의 빈자리를 채워주길 바랐을 테지만... 리그 평균 20골, 시즌 평균 30골 정도를 넣어주는 데다가 그 '''악마의 왼발'''로 어메이징한 플레이를 보여주며 서포터들의 눈까지 즐겁게 해주었던 히바우두에 비해 사비올라는 득점력도 기대에 못 미쳤을 뿐더러 플레이의 '''보는 맛'''도 부족했던 것이었다. 그 유명한 발렌시아전에서의 오버헤드킥이라든지... 한 폭의 그림같았던 프리킥들이라든지... 2002-03 시즌엔 반 할 감독의 3톱 전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춤하다, 새로 부임한 안티치 감독의[* 세르비아 출신으로 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 모두에서 감독을 맡았던 경력의 소유자다.] 정석적 4-4-2 전술에선 자신의 이상적 위치인 투톱의 스몰로 클루이베르트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2003-04 시즌 레이카르트 감독의 3톱 전술에서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맡았고, 14골을 넣긴 했으나 전술에 녹아들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결국 [[FC 바르셀로나|바르샤]]는 2003-04 시즌이 끝나자 클루이베르트는 팔아 버렸고, 사비올라도 임대 보내버렸다. 사비올라의 입장에선 [[토사구팽]]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닌 상황. 설상가상 [[2003년]]에는 [[호나우지뉴]]가 바르셀로나에 강림하면서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만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스트라이커'''였기 때문이다. 사비올라는 키 169cm의 작은 키이며 전술적으로는 스피드를 살린 최전방침투와 결정력을 살리는데 주력하는 그야말로 정통 스트라이커이며 일반적인 빅-스몰 투톱 시스템의 스몰에 어울리는 투톱형 스트라이커였다. 한마디로 '''원톱이 불가능한 포워드'''. 그런 선수를 딩요 데려와 다시 만든 바르샤식 3톱 시스템의 중앙에다 넣어 맞추려고 하면 맞춰지나...[* 파트릭 클루이베르트와 클래식 투톱을 뛰던 시기인 2002-03 시즌에는 빅-스몰의 조합이 적절했기에 사비올라의 득점력이 발휘되어 개인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시기가 한참 [[루이 판할]]감독의 전술적 삽질 등으로 성적이 널을 뛰었다는게... 사비올라와 같은 문제를 [[후안 로만 리켈메]] 역시 겪었고 결국 리켈메도 바르셀로나 전술에 적응 실패해 비야레알로 갔다. 참고로, 그 시기가 [[히카르두 콰레스마]]가 바르샤에서 병풍이던 시기다. 윙포워드가 4-4-2에서 윙으로 뛸 수가 없으니.][* 그래서 팬들 사이에서 스트라이커가 아닌 [[윙어]]로 정착했더라면 더욱 대성하지 않았을까 하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빠른 스피드와 침투, 그리고 수준급의 드리블 실력을 살릴 수 있다면 침투형 윙어로 보다 큰 활용가치가 있었을텐데 말이다.] 무엇보다도 서포터들은 [[호나우지뉴]]의 묘기에 가까운 플레이이에서 [[히바우두]]의 모습을 떠올리며 열광했을 것이다. 심지어 호나우지뉴는 히바우두가 했던 것과 거의 흡사한 바이시클 킥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2004년]]에는 [[사무엘 에투|카메룬산 흑표범]]과 [[헨릭 라르손|스웨덴의 전설]]까지 합류하면서 결국 2시즌 연속 [[AS 모나코]]와 [[세비야 FC]]에서 임대생활을 한 그는 [[2006년]] 바르셀로나로 복귀하지만 그 시기는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 후배]]가 떠오르며 주전자리를 확고히 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리고 원톱 자리는 [[사무엘 에투]]가 건재했으며, [[헨릭 라르손]]이 스웨덴으로 돌아갔지만 서브로 [[아이두르 구드욘센]]을 영입하여 사비올라는 제 3옵션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그는 다음해인 [[2007년]] [[루이스 피구]]에 이어 바르샤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로 직행한 선수가 되지만 이미 바르샤에서 그의 입지도 인기도 그저 그럴때라 피구 때만큼의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 CF]]의 스트라이커 자리에는 레알의 [[아이콘]] [[라울 곤살레스]]와 [[라리가]]에서도 득점왕을 거머쥐며 골폭풍을 몰아치던 [[뤼트 판니스텔로이]]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결국 제대로 출장기회도 잡지 못하고 2시즌 동안 벤치를 달구던 그는 [[2009년]] 갈락티코 시즌2 시작과 동시에 [[포르투갈]]의 [[SL 벤피카]]로 이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 이적은 사비올라의 커리어가 꼬이게 된 계기. 사비올라가 레알 마드리드에 소속된 2007년~2009년에는 라울과 반 니스텔루이 등의 스트라이커진이 자리를 확고히 잡은 시기였기 때문에 사비올라가 중용되지 못하였고 그 결과 2시즌 합쳐서 20경기조차 나오지 못했다. 차라리 주전 보장되는 팀에서 뛰었더라면 커리어가 좀 더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2007년 당시 사비올라의 나이는 26세였고 그 나이면 꼬였던 커리어를 풀 수 있을 충분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벤피카에선 좋은 활약하고 있다. 비록 대세는 포르투지만... 포르투가 워낙 대단한 거고 사비올라도 제 몫은 충분히 해내고 있다. [[2012년]] [[8월]]에 [[말라가 CF]]와 1년 계약을 맺고 이적하면서 다시 [[스페인]] [[라리가]]로 돌아왔다. 2013-14 시즌은 [[수페르리가 엘라다|그리스 리그]]의 [[올림피아코스 FC]]에서 활약했었고, 2014년 9월 세리에 A의 [[엘라스 베로나 FC]]로 이적하였다. 2015년 6월 21일 고향 클럽인 [[CA 리버 플레이트]]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고향팀 리버 플레이트에선 리그에서 한골도 넣지못하는 극심한 부진을 보여준 바람에 2016년 1월 8일자로 리버 플레이트와 계약 해지를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K리그 팬들은 '현재 빅네임이 필요하다는 [[전북 현대 모터스]]가 영입했으면 좋겠다.' 반응과 '이제 자국리그 에서도 안먹히는 퇴물선수인데 K리그 와도 안먹힐것 같다.'는등 여러반응이 나뉘고 있다. === 국가대표 === 포스트 [[디에고 마라도나|마라도나]]의 최선봉으로 여겨졌던 선수답게 어린 시절부터 대단한 각광을 받았다. 실제로도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 득점왕에 오르며, [[파브리시오 콜로치니]]와 [[막시 로드리게스]] 등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기대치 때문에 당시의 축구 게임 챔피언십 매니저([[풋볼 매니저]]의 전신)에서는 '''무조건 세계 최고가 되는 선수'''로 이름을 널리 떨쳤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엔트리에는 뽑히지 못했다. 황혼기에 접어든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월드컵 직전 A매치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한창 때였던 [[에르난 크레스포]]가 있는 상황에서 그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2002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엔트리를 보면 다소 아쉬운 점도 많이 있었다. 물론 바티스투타가 건재했고 크레스포가 전성기였지만 문제는 사비올라 대신 당시 35세의 늙은 [[클라우디오 카니자]]가 뽑힌것. 아르헨티나가 2002년 월드컵 본선에서 조별리그에 탈락한 이유도 바로 바티스투타에게만 의존한 공격진 때문이다.[* 4년 후 [[독일 월드컵]]에서 또다시 죽음의 조에 걸렸음에도 2002년과 달리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며 조 1위를 차지했다. 결국 이런 원패턴 공격전개가 아르헨티나가 죽음의 조에 희생양이 된 이유였다.] 당시 잉글랜드는 [[리오 퍼디난드]]와 [[솔 캠벨]]이라는 유럽 최정상 수비라인을 구축하고있는 사실상 시드권팀에 필적하는 전력을 가진 팀이였다. 잉글랜드가 선제골 이 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우주방어에 성공한 이유도 바로 월드 클래스 수비진 덕분이였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아르헨티나가 역전에 성공했을 것이다. 스웨덴전 역시 [[안데르스 스벤손|스벤손]]의 기습적 프리킥에 일격을 당한 이 후 아르헨티나는 가장 강력한 공격력으로 스웨덴의 골문을 노렸지만 문제는 스웨덴에게 역시 2001년 유럽 최우수 수비수로 선정된 [[파트리크 안데르손]]과 그를 보좌하는 [[요한 미엘뷔]]라는 유럽 정상급 수비라인을 구축한 팀이였고 후반 막판 크레스포가 동점골을 넣었으나 이미 늦은 상황이였다. 괜히 아르헨티나의 F조가 죽음의 조로 불린게 아니며 이런 상황에서 사비올라라는 카드는 아르헨티나 공격진의 다양성을 제공해 줄 수 있었고 당시 바티와 크레스포가 건재하더라도 충분히 조커 역할로도 활용할 수 있었지만 사비올라 대신 노장의 카니자는 2002년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초도 뛰지 못했고, 3차전인 스웨덴과의 경기 도중 벤치에서 퇴장을 당했다. 2003년 리비아와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 첫 골을 기록했고, 같은 해 한국과의 친선경기에서도 결승골을 기록했다. 이 후 [[코파 아메리카|2004 코파 아메리카]]에서 에콰도르와의 1차전에 국제 메이저 대회 첫 골과 첫 해트 트릭을 동시에 이루면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뤘다. 하지만 이 후 경기에서는 부진했고 아르헨티나는 그래도 [[카를로스 테베즈]],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등 또 다른 대형 신인들의 활약으로 결승까지 진출하지만 브라질과의 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 엔트리에 올라 선배인 [[에르난 크레스포]], [[후안 파블로 소린]] 등과 같이 호흡을 맞추며 코트디부아르전에서 득점을 올렸다. 하지만 이 월드컵 이후에는 스스로가 부진하고 그를 대체할 자원으로 이미 [[카를로스 테베즈]]가 건재한데다 이 후에도 [[세르히오 아궤로]], [[곤살로 이과인]]이 등장하는 바람에 2007년을 마지막으로 다시 국가대표 엔트리에 오르지 못했다. 참고로 사비올라의 백업이 [[리오넬 메시|추후 펠레, 마라도나와 어깨를 나란히 혹은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19살 소년]]이였다. == 플레이 스타일 == 투톱형 스트라이커 시대의 마지막 세대에 데뷔를 했지만, 원톱 시대의 [[SL 벤피카]] 시절과 [[말라가 CF]] 시절에도 나름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며 원톱으로도 나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중 사비올라의 가장 큰 장점은 날렵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하는 순간 공간 침투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코트디부아르전 선제골 역시 순간 공간침투로 기록한 득점이다. 또 득점력도 좋았고 남미 선수 다운 화려한 발재간과 동료선수들과의 연계 플레이도 잘했으며 오프 더 볼 능력도 준수했다. 다만 아쉬운건 경기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역량을 지닐 정도의 실력은 지니지 않았기에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나쁘지 않는 스텟을 올렸음에도 바르셀로나의 전임 에이스인 [[히바우두]]와 비교해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기복도 은근 심하게 타기에 특히 2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2007년 [[레알 마드리드]]에서 매우 저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라울 곤살레스]]. [[뤼트 판니스텔로이]] 등 공격진이 건재한 이유도 있지만 앞에 언급한 것 처럼 [[크랙]]의 자질까지 갖추지 못했기에 저 둘을 뛰어넘기는 커녕 벤치만 달구게 되었고 기회를 받았더라도 본인이 살리지 못했다. 그 외에도 단점이라면 오프 더 볼 능력은 준수했으나 경기 전체를 읽는 흐름이 좋지 않고 아무래도 체구가 작다보니 공중볼 경합 및 세트피스 상황에선 거의 계륵이나 다름 없으며 체력 및 수비가담도 그리 뛰어나지 않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바로 이점이 레알 마드리드에서 사비올라가 라울과 반 니스텔루이를 넘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며, 국대에선 동갑내기 [[막시 로드리게스]]와 2004년 나타난 대형 신인 [[카를로스 테베즈]]에게 밀리고 말았다. 모든 선수마다 각각 장점과 단점이 있고 사비올라 역시 장점과 단점이 극명한 선수였다. 즉 특정 포지션에 최적화된 선수다 보니 2000년대 중반부터 점점 멀티플레이 능력이 중요시되는 축구 트랜드에 밀려나게 되었다. == 평가 == 결과적으로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 보여준 임팩트가 너무 강했고 어떻게 보면 사비올라의 커리어 하이(...) 일 정도로 사비올라의 경우 어린나이에 벌써 빅클럽 이적이 오히려 독으로 다가온 셈이다. 이 후 [[카를로스 테베즈]][* 2004 하계 올림픽 남자축구 금메달], [[세르히오 아궤로]][* 2007 [[FIFA U-20 월드컵]]MVP 수상] 등이 처음부터 매머드 클럽으로 이적하지 않고 차근차근 프로팀에 실력을 쌓으며 성공했을때 사비올라도 조금 낮은 레벨부터 프로팀에 활동했다면 더 빛을 볼 수 있었던 선수였다. 그래도 [[2006 FIFA 월드컵 독일|독일 월드컵]]에서 아직 건재한 [[에르난 크레스포]]와 또다른 대형 신인 스트라이커인 [[카를로스 테베즈]]의 등장에도 나름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국가대표팀에서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 후 스스로 부진하여 대표팀에서도 멀어졌고, 나름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해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커리어가 더 꼬이면서 그저그런 선수로 전락해버렸다. 다음 세대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라이벌 국가]]의 [[오스카(축구선수)|오스카]]와 유사점이 많다. 두 선수 모두 컨디션이 좋은 날엔 제어가 불가능하지만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엔 바로 잠수를 타는 점. 차이점이라면 기술적인 부분은 사비올라가 뛰어난 반면 축구 지능은 오스카가 더 뛰어났다. 또 사비올라는 선수생활 황혼기 나이에도 비록 중위권이지만 유럽무대에 오래 활약했다. == 기록 == === 리그 기록 === ||시즌||클럽||리그||경기||골|| ||1998/99||리버 플레이트||프리메라 디비시온||19||6|| ||1999/00||리버 플레이트||프리메라 디비시온||33||19|| ||2000/01||리버 플레이트||프리메라 디비시온||34||20|| ||2001/02||FC 바르셀로나||라리가||36||17|| ||2002/03||FC 바르셀로나||라리가||36||13|| ||2003/04||FC 바르셀로나||라리가||33||14|| ||2004/05||AS 모나코||리그 1||29||7|| ||2005/06||세비야 FC||라리가||29||9|| ||2006/07||FC 바르셀로나||라리가||18||5|| ||2007/08||레알 마드리드||라리가||9||3|| ||2008/09||레알 마드리드||라리가||8||1|| ||2009/10||벤피카||프리메이라 리가||27||11|| ||2010/11||벤피카||프리메이라 리가||24||9|| ||2011/12||벤피카||프리메이라 리가||18||4|| ||2012/13||말라가||라리가||27||8|| ||2013/14||올림피아코스||수페르리가 엘라다||25||2|| ||2014/15||올림피아코스||수페르리가 엘라다||1||0|| ||2014/15||엘라스 베로나||세리에 A||8||1|| === 대회 기록 === * [[CA 리버 플레이트]] (1999~2001, 2015~2016) * [[수페르리가 아르헨티나|프리메라 디비시온]]: 1999 아페르투라, 2000 클라우수라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015 * J리그컵-코파 수다메리카나 챔피언십: 2015 * [[세비야 FC]] (2005~2006) * [[UEFA컵]]: 2005-06 * [[레알 마드리드 CF]] (2007~2009) * [[라리가]]: 2007-08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8 * [[SL 벤피카]] (2009~2012) * [[프리메이라 리가]]: 2009-10 * [[타사 다 리가]]: 2009-10, 2010-11, 2011-12 * [[올림피아코스 FC]] (2013-14) * [[수페르리가 엘라다]]: 2013-14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2001 * [[올림픽]] 금메달: 2004 *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2004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준우승: 2005 === 개인 수상 === * [[수페르리가 아르헨티나|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999 아페르투라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99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99 *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1999 *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골든볼: 2001 *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골든슈: 2001 * 트로페오 EFE: 2001-02 * [[프리메이라 리가]] 이달의 선수: 2009년 12월 * 포르투갈 골든볼: 2010 * [[FIFA 100]]: 2004 == 여담 == === 가족관계 === 축구계, 그것도 남미에서는 흔치 않은 [[무녀독남]]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남미 축구선수들에 비해 과거사진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파일:external/www.magxone.com/Romanella-Amato-FHM-Portugal-Cover-Page.jpg]] [[파일:external/leclubfoot.com/Romanella-Amato6.jpg]] [[파일:external/img.giaoduc.net.vn/romanella_amato_javier_saviola_bo_nguoi_dep_giaoduc.net.vn%20(1).jpg]] [[파일:external/www.webconferencia.net/20234755ch-2.jpg]] 1991년생인 로마넬라 아마토(Romanela Amato)는 아르헨티나의 모델로 1981년생 사비올라와 16살(!!!)인 2008년부터 교제했다고 알려져있다. 둘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약혼했고, 아들, 딸이 한 명씩 있다. [각주] [[분류:1981년 출생]][[분류:1998년 데뷔]][[분류:2016년 은퇴]][[분류:공격수]][[분류: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 인물]][[분류: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분류:아르헨티나의 축구감독]][[분류:CA 리버 플레이트/은퇴, 이적]][[분류:FC 바르셀로나/은퇴, 이적]][[분류:AS 모나코/은퇴, 이적]][[분류:세비야 FC/은퇴, 이적]][[분류:레알 마드리드 CF/은퇴, 이적]][[분류:SL 벤피카/은퇴, 이적]][[분류:말라가 CF/은퇴, 이적]][[분류:올림피아코스 FC/은퇴, 이적]][[분류:엘라스 베로나 FC/은퇴, 이적]][[분류:아르헨티나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선수]][[분류:2004 코파 아메리카 페루 참가 선수]][[분류:2005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독일 참가 선수]][[분류:아르헨티나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4 아테네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2004 아테네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아르헨티나의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분류:2001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아르헨티나 참가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