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조선총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61041, #062861 20%, #062861 80%, #061041)" '''{{{#eccd7a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한국통감)] ---- [include(틀:일본군/원수)]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580, #002984 20%, #002984 80%, #000580)" {{{#ffffff '''임시 한국통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61041, #062861 20%, #062861 80%, #061041)" {{{#eccd7a '''제2대 조선총독''' [br] {{{+1 '''하세가와 요시미치''' }}} '''長谷川好道 | Hasegawa Yoshimichi'''}}}}}}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segawa_Yoshimichi.jpg|width=100%]]}}} || ||<|2> '''출생''' ||<(> [[1850년]] [[10월 1일]] || ||<(> [[스오]]국 구가군 (現 [[야마구치현]] 구가군) || ||<|2> '''사망''' ||<(> [[1924년]] [[1월 27일]] (향년 73세) || ||<(> 도쿄부 도쿄시 (現 도쿄도) || ||<|4> '''재임기간''' ||한국통감 임시대리 || ||[[1906년]] [[2월 1일]] ~ 1906년 [[3월 1일]] || ||제2대 조선총독 || ||[[1916년]] [[10월 14일]] ~ [[1919년]] [[8월 12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직업''' ||<(> 군인 || || '''작위''' ||[[백작]] || || '''정당''' ||<(> [include(틀:무소속)] || ||<-2> '''군사 경력''' || ||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오사카병학료]] || ||<|4> '''복무''' ||[[조슈 번|이와쿠니령]] 정의대 || ||1868년 ~ 1869년 || ||[[일본제국 육군]] || ||1871년 ~ 1916년 || || '''최종 계급''' ||[[원수(계급)|원수]] || || '''참전''' ||[[보신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리가 초대 [[한국통감부|한국통감]]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통감직을 한 달간 대리하고, [[일본 제국 육군]] [[원수(계급)|원수]]를 거쳐 제2대 [[조선총독부|조선총독]]을 지냈다. '''1919년 [[3.1 운동]]을 강경 진압하여'''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 생애 == === 초창기의 활동 === 1850년 [[조슈 번]] 이와쿠니의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육군은 조슈번 출신들이 독차지했다. 반면 해군은 사츠마 출신들이 독점] 어려서 초슈번 정의대에 입대하면서 군사경력을 시작했고 1868년 [[무진전쟁]]이 발발하자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1870년 오사카 병학료에 들어가 1871년 육군대위로 임관했다. 1873년 연대장으로 승진하면서 중좌 계급을 받았다. 1877년 [[세이난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1886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보병 12여단장에 임명되어 무려 10년간 재임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했으며 [[뤼순]] 공격으로 전공을 크게 올린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카조쿠, [[귀족]])이 되었다. 1896년 육군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3사단장으로 보임했고 근위사단장을 거쳐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1904년 6월 육군대장으로 승진하였으며 9월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육군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쵸슈벌의 안배로 [[조선주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07년 [[러일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07년, 요시히토 황태자(후의 [[다이쇼 덴노]])의 조선 방문 때에 [[숭례문]] 철거를 요구하는 어그로를 끌기도 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이 터지자 [[이완용]], [[송병준]] 등은 [[고종]]에게 [[하세가와]]에게 사죄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1912년부터 1915년까지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조선군(일본제국)|조선군]] 주둔 문제로 육군대신 이시모토 신로쿠가 사임해버리는 '2개 사단 증설 문제'가 발생하면서 군부의 위상에 타격을 입고 육군 내부에서 무능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1915년 [[원수]]로 승진, 1916년 [[백작]] 작위를 받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영전하자 후임 [[조선총독]]에 임명되는 등 관운은 계속 좋았다. === 제2대 조선총독 === || [[파일:/pds/200903/07/25/a0116025_49b241028f7ec.jpg|width=100%]] || || [[영친왕]]에게 경례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제2대 [[조선 총독]]으로 재임 당시.)[* 하세가와가 [[화족]]이긴 했지만 영친왕은 화족보다 높은 [[왕공족]]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장면이 연출된 것. 당연히 이런 태도를 통해 "일본이 구 한국 황족을 존중한다"라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속임수이자 허울이었다.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구한국 황실은 강제병합 이후 일본에서 천황(소위 '덴노')가 다음 가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즉,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한반도]] 내에서 전권을 가지고 있지만, [[고종(대한제국)|李太王]]과 [[순종(대한제국)|李王]]에 대한 것은 건드릴 수 없었다.--물론 구 한국황실은 실권은 없던데다가 왕공족 본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사항 외에 그 주변에 대하여서는 언제든지 강제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다--] || 1916년 제2대 [[조선 총독]]에 임명된 하세가와는 [[데라우치 마사타케|전임 총독]]에게서 [[무단통치]]를 계승했다. 다만 [[하세가와]]는 애초부터 정치에 문외한인 철저한 군인 출신이므로 노련한 데라우치와 달리 자신만의 통치 스타일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3.1 운동]]을 강경진압했지만, 국내 역사책이나 언론에서 전임 총독인 데라우치에 비해 다뤄지는 빈도가 훨씬 적다. 특히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총독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하세가와]]는 '전임자의 행정적 자취를 답습'한다는 수준의 평가를 받았으며 데라우치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하세가와]]의 말은 따르는 척 하면서도 수면 아래에선 그의 명령에도 복지부동으로 일관했다. 거기에 하세가와의 금전적 탐욕 때문에 부하 관료들의 불만이 축적되어 배신자 소리가 공공연히 나오는 판국이었다. 이러한 [[하세가와]]의 토색질 때문에 [[무단 통치]]의 근간이 되는 [[일본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대]]의 사찰을 위한 비용까지 삭감되어서 하세가와 시절엔 [[일제]]의 [[무단 통치]]가 무단 통치가 아닌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기에 이른다. 사실 하세가와는 본인이 싫다는 것을 데라우치가 조선을 조슈 군벌 외에 다른 자들에게 줄수 없다고 억지로 끌어와서 앉힌 판국이었다. 이러한 나날은 말년까지 이어져서 [[일본 제국|일제]]에 도움이 된 [[토지 조사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사망하면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심지어 [[대한제국]]의 기독교도들도 탄압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저질렀다. 하지만 이로 인해 [[조선]]은 물론 [[일본]]과 해외에서도 비판을 받았으며 통치를 어떻게 했길래 이런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냐는 비판을 받아 하세가와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그와 같은 파벌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시베리아]] 출병, 쌀 사건으로 인해 퇴임하면서 동시에 몰아닥친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게 되는데 이후 [[일본]]에서 후임 [[조선 총독]]을 누구로 정할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하라 타카시]], [[다나카 기이치]]를 중심으로 하는 문민 총독론과 육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인 총독론이 강하게 대립했는데 이들의 의견을 절충한 것이 법제상으로는 문민 총독 임명도 가능하게 하는 대신 신임 총독에 해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를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총독부 관제 개혁이 이루어져 절대군주와도 같았던 [[조선총독]]의 권한 및 [[총독부]]의 구성에 대해 손을 보게 된다. [[데라우치]]와 [[사이토]] 사이에 낀데다 [[3.1 운동]]의 폭풍으로 묻혀버린 인물인데, [[3.1 운동]]을 강경 진압한 장본인이면서도 이후 [[문화 통치]]의 큰 목적을 이미 구상해놓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총독]]을 사임하면서 사이토에게 인수 인계와 함께 남긴 조언문이 제도와 통제를 완화하고,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구성과 양국인의 혼인 장려 등 [[내선일체|조선과 일본의 동화]] 수준을 높여나가야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던 것. 사실 그가 특이한 건 아니고 [[일본 제국]]에선 진작부터 [[조선]]에 대한 가혹한 정책이 오히려 [[조선]]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무단 통치 철폐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후 [[니토베 이나조]] 교수 등이 주장한 동화 정책이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 의해 채택됨으로 우리가 아는 문화 통치가 실시되게 된다. === 이후 === [[3.1 운동]]이 발생한 후 조선인들을 가혹하게 다루어서 대소동을 불러일으켰다고 군부와 정계의 질타를 받았고 결국 이에 책임을 지고 조선총독직에서 사퇴했고, 후임으로는 [[사이토 마코토]]가 들어왔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 후 별 일 없이 지내다가 1924년 1월 27일, [[도쿄]]에서 사망했다. 향년 73세. [[소공동]]의 해방 이전 이름이 장곡천정(長谷川町)이었는데, 바로 이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성에서 따온 것이었다. == 대중매체 == * 1979년 [[KBS]] 8.15 특집극 <대한국인>에서는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홍성민이 연기했다. * 1984년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는 배우 [[주현]]이 연기했다. * 1985년 [[KBS]]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서는 배우 서상익이 연기했다. * 1996년 연극 <제국의 광대들>에서는 배우 곽동철이 연기했다. * 2018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배우 윤대열이 연기했다. 일본 조선주차군 사령관 시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한국통감부]]에서 [[이토 히로부미]]과 함께 하는 장면이 많았다. 작중에서 원래 사령관 자리는 [[모리 타카시]]가 맡을 계획이었지만 암살당하면서 대신 하세가와가 온 것으로 각색되었다. [[분류:일본군 육군 참모총장]][[분류:한국통감·조선총독]][[분류:1850년 출생]][[분류:1924년 사망]][[분류:이와쿠니시 출신 인물]][[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종1위]][[분류:일본의 백작]][[분류:보신 전쟁/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