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克諴 [[1543년]]([[중종(조선)|중종]] 38) ~ [[1593년]]([[선조(조선)|선조]] 26) [[5월 16일]] [목차] == 개요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 질경공파(質景公派) 18세 극(克) 항렬.], 자는 극숙(克淑).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있었다. == 일생 == 1543년 정6품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낸 아버지 한개(韓漑)와 어머니 [[전주 이씨]] 이득전(李得全)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588년(선조 21) 10월 29일 종3품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로 [[명령불복종|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군졸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참살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110029_003|#]]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종2품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있었는데,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함경도로 막힘없이 전진해오자 한극함이 기병과 [[사수]]부대를 이끌고 해정창(현재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에서 막아섰다. 한극함의 함경도 정예기병들은 신들린 말타기로 기요마사의 부대의 공격을 모두 피하고 활로 한 명씩 죽여가며 결국 1차전에서는 승리하였다. 그러자 가토 기요마사가 해정창 창고로 도망갔는데, 한극함이 그 창고를 빙 둘러 포위하자 창고에서 전열을 정비한 왜군의 총알이 빗발쳐 결국 한극함의 부대는 괴멸했고, 잠시 후퇴한 시간에 가토 기요마사가 새 철포부대를 데리고 와 결국 패배했다. 이 전투가 바로 [[해정창 전투]]이다. 이후, 한극함은 경기도로 도망가려고 했으나 결국 왜군에게 붙잡혔다. 그 후 가토의 포로가 된 [[임해군]], [[순화군]] 일행에 합류하여 철수하는 왜군과 함께 한양 인근까지 왔을때 단신으로 탈출, [[고언백]]의 조선군 부대에 구출되었으나, 해정창 전투 패전의 책임과, 두 왕자를 끝까지 호종하지 않고 혼자 살려고 도망쳤다는 탄핵이 빗발쳐 1593년 5월 16일 사형을 당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5016_001|#]] == 일본 문화에서 == 임진왜란 후에는 일본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전공을 띄우기 위해 실제보다 그 활약이 크게 과장되어, 모쿠소호간([[김시민]] 장군)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대장군 캐릭터(대충 김시민이 조선 남부 4도의 총대장, 한극함이 북부 4도의 총대장으로 과장되었다)로 임진왜란을 다루는 일본의 문학, 연극 등에 [[최종보스]]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키가 8척이 넘는 거인이었으나 용맹한 가토 기요마사에게 패했다는 식으로 가토의 용맹을 높이는데 사용되었다. 김시민 장군이 직함인 목사판관의 일본어인 모쿠소호간으로 불린 것처럼 한극함도 직함인 절도사가 일본어로 전해진 '''[[셀토스|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고 불렸는데, 후일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가서 이런 작품들을 접하면서도 일본어를 잘 몰라 줄거리 파악도 잘 안되는데다가 세루토스가 절도사인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하고 '세루토스라는 외국인이 조선에 표류해 살다가 왜군의 앞잡이가 되었다'라고 잘못 와전해서 전하기도 했다.[[http://hermod.egloos.com/2146506|#]] [[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조선의 무관]][[분류:청주 한씨 질경공파]][[분류:1543년 출생]][[분류:159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