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오대십국시대/인물]][[분류:송나라/인물]][[분류:923년 출생]][[분류:968년 사망]][[분류:한단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2> '''{{{+1 韓令坤[br]한령곤}}}''' || || '''작위''' ||남양군왕(南陽郡王) || || '''공신호''' ||추성봉의익대동덕공신(推誠奉義翊戴同德功臣) || || '''성''' ||한(韓) || || '''이름''' ||령곤(令坤) || || '''자''' ||덕순(德順) || || '''생몰''' ||923년 ~ 968년 || || '''출신''' ||자주(磁州) 무안현(武安縣) || || '''부친''' ||한륜(韓倫)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대십국시대]] [[후주]], [[북송]]의 장수로 자는 덕순(德順)이다. == 생애 == 자주(磁州) 무안현(武安縣) 출신으로 923년 한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에는 [[곽위]]의 부하였다. 951년 곽위가 [[후주]]를 건국한 뒤 철기산원도우후(鐵騎散員都虞候), 공학우제1군도교(控鶴右第一軍都校)를 역임했고 화주자사(和州刺史)를 겸임하였다. 954년 [[시영]]이 즉위한 뒤 전전도우후(殿前都虞候)로 제수되었고 [[고평 전투]]에서 공을 세워 용첩좌상도우후(龍捷左廂都虞候)로 임명되고 용주단련사(容州團練使)를 겸임하였다. 같은 해 용첩좌상도지휘사(龍捷左廂都指揮使)로 진위되고 사주방어사(泗州防禦使)를 겸임하였으며, 시영이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을 정벌할 때 행영전군마군도교(行營前軍馬軍都校)가 되었고 얼마 안 있어 시위마보군도지휘사(侍衛馬軍都指揮使)로 임명되고 정무군절도사(定武軍節度使)를 겸임하였다. 955년, 후주의 재상이 이곡이 남당 정벌을 위해 회남도행영전군도부서(淮南道行營前軍都部署)로 임명되고 한령곤 등 12명의 장수들을 통솔하여 출정하였다. 이곡이 정양으로 물러날 때 한령곤은 [[선조(송)|조홍은]], [[이중진]]과 합류하여 남당군을 물리치고 유언정(劉彦貞)을 대패시켰다. 시영은 양주의 방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령곤, 조홍은, 백연우, 조조 등을 양주성으로 출병시켰다. 한령곤은 먼저 백연우에게 정예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새벽에 출병하도록 명했고 양주성에서는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뒤이어 도착한 한령곤은 양주성의 백성들을 안심시켰고 남당의 동도부유수(東都副留守) 풍연로를 사로잡아 압송한 뒤 시영으로부터 지주사로 임명되었다. 양주성 함락 소식이 태주(泰州)로 날아들자 태주에서도 항복을 청하였다. 한편 [[오월(오대십국시대)|오월]]의 [[전홍숙]]은 후주로부터 내려온 요구에 호응하여 남당의 상주(常州)와 윤주(潤州)를 공격하고 비릉(毗陵)을 포위하였으나 도리어 남당에 패배했다. 전홍숙의 공세를 물리친 남당의 장수 육맹준(陸孟俊)은 승승장구하여 태주를 수복했다. 뒤이어 육맹준이 촉강(蜀岡)으로 진군하자, 한령곤은 결국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소식을 접한 시영은 분노하여 조광윤과 장영덕을 육합(六合)으로 출병시켜 양주성을 구원하도록 명하였다. 한령곤은 원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양주성으로 입성하여 양주성을 수비했고 육맹준의 군대와 싸워 육맹준을 크게 물리치고 사로잡았다. 또한 마귀(馬貴)를 초주(楚州) 만두언(灣頭堰)에서 물리쳤고 연주자사(漣州刺史) 진진숭(秦進崇)을 사로잡았다. 뒤이어 상공을 연강초토사(緣江招討使)로 임명하고 한령곤을 초토부사로 임명하여 수주(壽州)로 출병시켰다. 957년 수주를 함락시킨 뒤 조정으로 돌아와 검교태위(檢校太尉)가 더해지고 진안군절도사(鎭安軍節度使)를 겸임하였다. 958년, 시영이 다시 남당 정벌을 단행할 때 초주(楚州)에 이르러 한령곤을 먼저 양주로 보내 임시로 양주의 지주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양주성이 남당에게 함락되자, 한령곤은 수성도부서(修城都部署)로 임명되어 양주성을 수리하였다. 959년 3월, 시영이 요나라 정벌을 단행할 때 한령곤에게 용첩군, 호첩군, 효무군을 동원하여 먼저 대명부(大名府)로 출병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익진관일로도부서(益津關一路都部署)로 임명되어 왕안을 보좌하였고 패주도부서(霸州都部署)로 임명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패주에 주둔하였다. 같은 해 시영이 죽고 시영의 4남 [[시종훈]]이 즉위하자, 검교태위(檢校太尉), 시위마보군도우후(侍衛馬步軍都虞候)가 더해졌고 다시 진안군절도사를 겸임하였으며, 겨울에 북변을 방비하였다. 960년, 조광윤이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북송을 건국하니 이가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이다. 이때 한령곤은 태조로부터 중용되어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를 겸임하고 시위마보군도지휘사,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더해졌다. 같은 해 태조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이균]]이 반란을 일으키자, 태조는 이균에 대한 친정을 결심하고 한령곤을 하양(河陽)에 주둔시켰다. 이균의 반란이 평정된 뒤 태조는 예현강무전(禮賢講武殿)에서 잔치를 열어 한령곤 등을 초대할 때 차등 있게 상을 내렸으며, 한령곤은 공적을 세워서 시중(侍中)을 겸임하였다. 한편 이균에 이어 [[이중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중진을 토벌할 때도 참전했다. 961년, 한령곤은 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로 전출되고 북면연변병마도부서(北面緣邊兵馬都部署)를 맡았다. 한령곤이 부임하기 직전 별전에서 한령곤에게 잔치를 베풀고 술을 내렸으며, 한령곤에게 통치에 힘쓰도록 조언하였다. 한령곤은 상산(常山)에 7년 동안 진수했다. 968년, 한령곤은 등에 난 종기로 인해 사망했다. 태조는 소복을 입고 강무전(講武殿)에서 거애하며 한령곤의 죽음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으며, 한령곤의 아들인 한경조(韓慶朝)를 한구사(閑廄使)로 삼고, 한경웅(韓慶雄)을 한구부사(閑廄副使)로 삼았다. 한령곤은 재략이 있었고 다스리는 도리를 알았으며, 태조와 함께 주나라(周)를 섬겨 정의가 좋았고 친밀하였다. == 기타 == * 육맹준은 양소운(楊昭惲)의 집안을 도륙하고 그 집안의 재산을 전부 차지했다. 951년, [[초(오대십국시대)|초나라]]가 [[남당]]에게 멸망한 뒤 초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마희숭]]은 양주에 안치되었는데 한령곤이 남당을 정벌할 때 마희숭은 한령곤에게 기생 양씨를 바쳤고, 한령곤은 양씨에게 총애를 주었다. 육맹준이 사로잡힌 뒤 한령곤은 장차 육맹준을 시영에게 압송하려고 했는데, 양씨가 천막 너머에서 육맹준을 보고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한령곤이 양씨에게 연유를 물으니, 양씨는 한령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육맹준은 왕년에 담주(潭州)에 입성하여 우리 집안 200명을 죽였지만 오직 저만은 마희숭에게 숨겨져 다행히 죽음을 면했습니다. 장군께서 육맹준을 처형하셔서 우리 집안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한령곤이 육맹준에게 양씨의 일을 힐문했고 육맹준은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