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독일 국방군/장성급 장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1 한스 파울 오스터}}}[br]Hans Paul Oster'''}}}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378px-Bundesarchiv_Bild_146-2004-0007,_Hans_Oster.jpg|width=100%]]}}} || ||<|2> '''출생''' ||[[1887년]] [[8월 9일]] || ||[[작센 왕국]] [[드레스덴]][br](現 [[독일]] [[작센]] 주 드레스덴) || ||<|2> '''사망''' ||[[1945년]] [[4월 9일]] (57세) || ||[[나치 독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 || ||<|2> '''복무''' ||[[독일 육군(나치 독일)|나치 독일 육군]] || ||[[1935년]] ~ [[1944년]] || || '''최종 계급''' ||[[소장(계급)|소장]] || ||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br][[제2차 세계 대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나치 독일 육군의 [[장교]]이자 반나치주의자. == 생애 == 한스 오스터는 1887년 [[작센 왕국]] [[드레스덴]]에서 [[알자스|알자스인]] 프랑스 개신교 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테어났다. 1907년 [[독일 제국군]] 육군 장교로 입대하였으며, 서부전선에 배치되었고, 1916년 대위로 장군참모로 임명되기 전까지 서부전선에 있었다. 전후에는 국가방위군에 남았다. 하지만 오스터는 비무장지대에서의 행동으로 인해 사임당했다. [[헤르만 괴링]]은 그의 사임 이후 그에게 [[아프베어]]에 근무하여 복직할 것을 제의했고, 그는 아프베어의 차장이 되었다. === 나치 정권 이후 === 오스터는 초기에 나치 정권을 환영하였으나 [[장검의 밤]] 이후 나치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군에 재입대하였으나 참모가 되지는 못했다. 이후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블롬베르크]]-[[베르너 폰 프리치|프리치]] 사건으로 인해 그는 완벽히 반나치주의자가 되었다. === 히틀러 암살 시도 === 그가 반나치주의자가 된 이후 그의 위치를 이용하여 음모를 많이 꾸몄다. 1938년 오스터는 [[얄마르 샤흐트]]과 함께 [[루트비히 베크]] 장군과 [[프란츠 할더]] 장군에게 쿠데타를 요청하였으나, [[녹색 작전|만약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킬시]] 쿠테타를 일으키자고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실행하지 않았고, 쿠데타는 실패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그의 쿠데타에 대한 노력은 다시 생겼다. 하지만, [[융커]]들은 2차 세계 대전이 폴란드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라고 해서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1940년부터 1942년까지는 쿠데타의 시도는 없었다. 이후 1943년 유대인의 탈출을 도와준 혐의로 게슈타포에게 잡혔다. 이후 1944년에는 마찬가지로 반나치주의자인 아프베어의 수장,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대장(계급)|대장]]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러한 입지를 활용해 카나리스와 함께 여러 차례의 히틀러 암살을 꾀했다. [[오스터 음모사건]]이 그의 작품이다. 1944년의 거사에도 참여하였지만, 히틀러 암살이 실패함에 따라 카나리스 [[제독]] 등과 함께 1945년에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분류:1887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독일 국방군/인물]][[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교수형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