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행정구역]][[분류:함경남도]] [Include(틀:조선의 행정구역)] ||<-4> '''[[파일:조선 어기.svg|height=15]] [[조선|{{{#000000,#dddddd 조선}}}]]의 [[부(행정구역)|{{{#000000,#dddddd 부}}}]]'''[br]{{{#!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 || {{{#!wiki style="margin: -5px 0" '''{{{+1 함흥부}}}'''[br]咸興府[br]{{{-1 Hamheung-bu}}}}}} ||}}} || ||<-4>[[파일:대동여지도 함흥부.jpg|width=100%]] || ||<-4>[[파일:1872년 함흥지도1.png|width=100%]] || ||<-2> '''관아 소재지''' ||<-2> 함경도 함흥부 함흥읍 주남사(州南社) || ||<-2> '''하위 행정구역''' ||<-2> 1읍 27사(社) || ||<-2> '''인구''' ||<-2> 7만 1182명[* 1789년 『호구총수(戶口摠數)』의 기록을 기준으로 함.] || ||<-2> '''마지막 함흥부사''' ||<-2> 김유성(金裕成)[* 1896년 5월 15일,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한 마지막 함흥부 관찰사] || [목차] [clearfix] || [[파일:1910년 경 함흥객사 함산관과 함흥시내 전경.jpg|width=100%]] || [[파일:함흥 만세교와 낙만루.jpg|width=100%]] || || 함흥객사 함산관과 함흥읍내 전경 || 함흥 만세교와 낙민루 풍경 || || [[파일:함남함흥 본궁 본전.jpg|width=100%]] || [[파일: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함흥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비각 전경.jpg|width=100%]] || || 함흥본궁 정전의 모습 || 함경남도 함흥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비각 전경 || == 개요 == >'''咸興府, 乃本道要衝之地。 東有咸關嶺, 道路險阨, 眞一夫當百之地, 且興王之地, 非他州郡之比。 宜設巨鎭, 以嚴賊虜瞻視, 前所築邑城低微, 館舍卑狹, 故自去年八月, 始改營之, 然事巨力微, 未易訖功。 本邑居民, 限四五年, 除行城之役, 俟營造功畢, 邑城東南面, 從古城基造築。''' > >'''함흥부는 바로 본도의 요충지로서 동쪽에 있는 함관령은 길이 험하고 좁아서 진실로 한 사람이 백 사람의 군사를 방어할 수 있는 땅이며, 또 왕의 출생지로서 다른 고을에 비할 바가 아니니, 마땅히 큰 진을 설치하여 도적들의 보고 들음을 엄하게 할 것입니다. (중략)''' >---- >문종실록 6권, 문종 1년 2월 13일 임오 3번째기사 中 [[조선시대]] 함경도 함흥 지역을 다스리던 [[부(행정구역)|부]]. 함경도 감영이 있었던 관북 최대의 대고을이자 [[조선왕조]]를 일으킨 풍패지향으로 꼽혔던 지역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조선)|태조 이성계]]가 이곳을 기반으로 성장하였으며, 조선 제2대 국왕 [[이방과|정종]]과 3대 국왕 [[이방원|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조선 역사상 [[한성부]]를 제외한 지역에서 가장 많은 국왕을 배출한 고을로서 그 위상이 남달랐다. == 역사와 문화 == 이 지역은 예로부터 함경도 지역에서 따뜻하고 벼농사가 잘 되었던 땅이었다. 때문에 초창기에는 [[고조선]]의 영향권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옥저]]가 이 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영토로 두었으며, 옥저가 고구려에 병합된 이후로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로는 수백년간 [[여진족]]의 지배하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1107년, 마침내 윤관이 여진족들을 공격하고 동북 9성을 세워 고려의 영토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1108년, 당시 동북 9성 지역에는 함주대도독부를 설치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여진족]]들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대몽항쟁이 끝나고서 몽골에 의해 합란부(哈蘭府)라는 명칭으로 [[쌍성총관부]]에 편입되었다. 이윽고 [[공민왕]]과 [[이자춘]]의 주도하에 1356년, [[쌍성총관부]]를 혁파하고 지함주사를 삼았다가, 곧이어 [[목(행정구역)|목]]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조선이 건국되었다. 조선왕조는 함흥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우를 하였으며, 이윽고 1416년에 함란부를 함흥이라는 명칭으로 바꾸고 부로 승격시켰다. 또한 조선시대 함경도 감영과 관찰사를 파견하여 함경도의 중심도시로 구축하였다 >政院啓曰: "薛罕嶺防守之事, 問于備邊司, 則: ‘江界防戌, 二月望後則無虞, 故江界最緊處外, 其餘小堡等土兵, 令府使盡發入送, 添戌嶺上耳。 令李鎰姑住寧遠, 應敵所往而赴之矣。’''' 今聞:‘北賊退向南路, 咸興盡爲焚燒。’ 云。''' 鎰則似當待天兵合勢, 踰人劒山, 或益水等嶺。" > >정원이 아뢰었다. "설한령을 방수(防守)하는 일을 비변사에 문의했더니 ‘강계 방수는 2월 보름 후에는 적침의 걱정이 없기 때문에 강계에서 가장 긴요한 곳 이외의 나머지 작은 보 등지의 토병은 부사로 하여금 모두 징발하여 입송해서 증원한 다음 설한령 위에서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이일로 하여금 우선 영원에 머물면서 적들이 가는 데를 따라 대응해서 나가도록 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북쪽의 적이 남쪽으로 물러가면서 함흥을 모두 불태웠다.’ 합니다.''' 그러니 이일은 중국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합세하여 검산(劎山)이나 익수(益水) 등의 고개를 넘어들어가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11일 병신 3번째기사 中 >咸鏡召募使黃璨馳啓曰: '''"吉州以南賊倭等, 全數合聚于咸與, 大小公廨, 盡被火燒。 賊衆, 自咸興至定平草 原館九十里間, 絡繹而來云。"''' > >함경도 소모사 황찬이 치계하였다. '''"길주 이남의 왜적들이 전부 함흥에 모였는데 대소 공해는 모두 다 불에 탔습니다. 적의 무리는 함흥으로부터 정평의 초원관에 이르기까지 90리 사이에 끊이지 않고 온다고 합니다."'''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20일 을사 7번째기사 中 >司憲府啓曰: '''"咸興爲府, 物衆地大, 素稱難治, 況今北鄙多事, 關防策應視平日爲重。''' 而新判官全有亨, 性本弛慢, 素無剸煩之才, 曾爲黃州判官時, 顯有不治之誚, 請命遞任, 以有名望文官, 各別擇遣 > >사헌부가 아뢰기를, '''"함흥부는 물산이 많고 땅이 넓어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일컬어졌는데, 더구나 지금은 북방 변경에 일이 많아 방비하고 책응할 일이 평일보다 훨씬 중대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임 판관 전유형은 성격이 본래 느슨한데다 평소부터 번거로운 업무를 처리할 재주도 없이 일찍이 황주 판관으로 있을 때 다스리지 못한다는 비난을 현저히 받았으니, 그를 체직시키도록 명하고, 명망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도록 하소서. >---- >광해군일기(정초본) 33권, 광해 2년 9월 18일 경신 2번째기사 中 >'''丙申/敎曰: "今年卽 聖祖定都之年, 來年卽聖祖誕降之年, 而永興爲誕降之地, 咸興爲豐沛之邑, 特減永興、咸興今年田賦及明年身役, 明春遣重臣, 設道科。"''' > >'''하교하기를, "올해는 성조께서 새로 도읍을 정하신 해이고 내년은 성조께서 탄강하신 해인데, 영흥은 탄강하신 곳이고 함흥은 풍패의 고을이니, 특별히 영흥·함흥의 올해 전부와 내년 신역을 감면하고, 내년 봄에 중신을 보내어 도과를 설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영조실록 82권, 영조 30년 7월 19일 병신 1번째기사 中 >掌令鄭毅祚啓言: "我國山多野狹, 不利車運, 惟北道之咸興諸處, 民皆習用。 水原一府, 地形之平衍, 與咸興無異, 今若創用車運, 一如咸興之制, 使江海之産、南北之貨, 往來委輸, 貿遷無難, 則必有益於營邑需用、居民資生之道。 請令廟堂, 講究車制, 指揮設施。" 從之。 > >장령 정의조(鄭毅祚)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좁아서 수레로 짐을 운반하는 것이 편리하지 못하고 오직 북도의 함흥(咸興) 등 여러 곳에서만 백성들이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원부(水原府)는 지형이 평평하여 함흥과 다를 바가 없으니 '''지금 함흥과 똑같이 수레로 운반하는 제도를 창안하여 강과 바다에서 나는 산물과 남쪽과 북쪽에서 생산되는 화물을 손쉽게 수송하여 유통하게 하면 틀림없이 고을의 수용(需用)과 주민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수레 제도를 강구하고 백성들을 지휘해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 >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10월 5일 을축 3번째기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