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호주 총리)] ||<-2> '''[[호주 총리|{{{#fff 호주 제17대 총리}}}]]'''[br]'''The Right Honourable[br]{{{+1 해럴드 홀트}}}[br]Harold Holt[br]CH'''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HaroldHolt.jpg|width=100%]]}}} || || '''{{{#white 본명}}}''' ||해럴드 에드워드 홀트 Harold Edward Holt|| ||<|2> '''{{{#white 출생}}}''' ||1908년 8월 5일|| ||[[호주 자치령]] [[뉴사우스웨일스 주]] 스탠모어|| ||<|2> '''{{{#white 실종}}}'''[*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실종된 당시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살아남아 있었더라도 약 60여년이 지난 지금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애초에 현 남성 세계 최고령자가 1909년생인데~~] ||1967년 12월 17일 (당시 59세)|| ||[[호주 자치령]] [[빅토리아 주]] 셰비엇 해안|| || '''{{{#white 직업}}}''' ||정치인|| ||<|2> '''{{{#white 재임}}}''' ||<#f5f5f5,#050505>[[호주 연방]] 제17대 총리|| ||1966년 1월 26일 ~ 1967년 12월 17일 {{{-2 (실종)}}}|| || '''{{{#white 정당}}}''' ||United Australia Party ^^(~1945)^^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1945~67)^^|| || '''{{{#white 모교}}}''' ||멜버른 대학교|| || '''{{{#white 배우자}}}''' ||로라 트링 ^^(1946년 ~ 1967년)^^|| || '''{{{#white 자녀}}}''' ||3명|| || '''{{{#white 서명}}}''' ||[[파일:Harold Holt signature.png|width=200&bgcolor=#fff]]|| [목차] [clearfix] == 개요 ==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인. == 생애 == 해럴드 홀트는 [[1908년]]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스탠모어에서, 토마스 홀트와 올리브 홀트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멜버른]]의 퀸즈 칼리지에서 법률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한 그는 1930년에 법률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대공황]] 때문에 일자리를 찾는 것이 늦어지기도 했지만 곧 안정된 일자리를 찾고 1936년에 사업 파트너의 딸인 로라 트링과 결혼에 이른다. 생활이 안정을 찾고, 정치 경력에 도전장을 내민 해럴드 홀트는 1933년, 호주연합당[* [[보수주의]] 정당, 1931년에 창당되어 1945년에 해산했다. 현재 호주 의회 양대 정당을 이루고 있는 자유당의 전신.]에 입당하여, 1934년의 호주 연방 선거, 1935년 3월의 선거에 연이어 출마하여 낙선되었으나, 1935년 8월의 포크너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 인생을 시작하였다. 이후 공급개발부 장관, 과학산업연구부 장관, 공군및 민간 항공부 장관, 노동행정부 장관을 역임하고, 어린이 세금 감면을 실시한 해럴트 홀트는, 1945년 연합 호주당이 해체되자, [[호주 자유당|자유당]]으로 자리를 옮겨 정치 인생을 이어갔고, 1949년 포크너 선거구를 떠나 히긴스 선거구에서 당선됨과 동시에 노동행정부 장관을 또 한번, 그리고 이민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56년엔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던 홀트는 경제 정책을 세우는데 실패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해결하며 1966년까지 장관직을 연임하다가, 1966년 1월 27일에 '''호주 연방의 제 17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호주 총리]]로 일하며 [[백호주의]]의 철폐, 호주 예술 위원회의 설립 등의 성과를 세웠다. 또 [[십진법]]을 도입하면서 기존의 호주 파운드를 현재의 [[호주 달러]]로 교체하였다. 외교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에 호주군을 파견하였고, 서방 국가들 대다수가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는 가운데 국공내전 이후 대만 주권 미정론을 구실로 마비되었던[* 국공내전 이후 주중 호주 대사관은 철수했고 대만에 추가로 대사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주 호주 중화민국 대사관은 철수하진 않았으나 새 대사가 임명되지 않으면고 영사만 주재하는 모호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6.25 전쟁으로 중공과의 수교가 물건너가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장제스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호주 측이 중국국민당 정권이 아니라 독립된 대만과의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중화민국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여 타이베이에 대사관을 설치하는 독보적 행보를 보였다. 1966년의 연방 총선에서 [[호주 국민당|국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압승하기도 한다. 1967년 초 부터 경제 무역 정책에 대하여 연정 내부에서의 반대 의견이 일기 시작했고, 베트남 전쟁 참전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된다. 같은 해 5월에는 신인 정치인의 연설을 방해하였으며, 10월에는 소속당인 연합당의 상원 의장이 VIP용 비행기를 남용한것에 대한 논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결국 홀트 내각은 1967년 11월 상원 선거에서 참패를 겪었으며, 이로 인해 홀트의 지도력과 건강에 대한 우려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 실종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eviot_Beach.png]] 해롤드 홀트 총리가 실종된 바스 해협의 셰비엇 해안. 현재는 수영이 금지되어 있다. [[1967년]] 12월 17일 일요일 아침, 홀트는 그의 이웃임과 동시에 숨겨둔 불륜 상대인 마저리 길레스피, 그녀의 딸 바이너, 딸의 남자친구 마틴 심슨, 길레스피 가족의 친구인 앨런 스튜어트와 함께 빅토리아주 포인트 네핀에 위치한 셰비엇 해안에 가게 되었다. 당일 오전에는 파도가 높고 사나웠음에도 불구하고 홀트는 수영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들어갔으나 곧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현직''' 총리가 실종된 것이다. 이후 오후 3시에 관할 [[경찰서]]에 실종신고가 들어와 [[빅토리아주|빅토리아]] 주경찰이 해안경비대와 함께 수색을 하였다. 하지만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인해 수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12월 20일에 수색을 중단하였다. 경비함정과 [[헬리콥터]], 잠수부 등을 동원한 얼마간 해상작전 끝에 결국 호주 해안경비대는 아무것도 못 찾고 [[1968년]] 1월 5일에 수색을 종료하였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고 간주, 12월 22일에 [[장례식]]을 [[멜버른]]의 세인트 폴 성당에서 가졌다.[[https://youtu.be/-cSMQGXICWk?t=104|당시 영상]] 이 때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도 참석했다. 호주는 대한민국의 맹방 중 하나였으며 그 때는 [[베트남 전쟁]] 시기로 한국과 호주 모두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였던 혈맹이었기 때문이다. === 실종에 대한 의혹 === 이전부터 홀트는 굉장한 수영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비타민 결핍증으로 고통받았고 실종 직전 기간 동안에 수영을 하다가 죽을뻔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는데다, 어깨 부상으로 인해 [[모르핀]]을 처방받던 상태였다. 이와 같은 홀트의 지병이 겹쳐, 수영 도중에 사망했다는 설이 주류이다. 허나 호주의 대중 매체들은 홀트가 총리로서의 삶을 버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 외에 [[2007년]]에 홀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기자는 홀트가 자살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고 일부에선 [[상어]]에게 잡아먹혔을 거라는 주장도 했다. 작가 앤서니 그레이는 홀트가 [[중국]]의 스파이였으며, 이 사실이 발각될 것 같자 [[중국 인민해방군]]의 잠수함을 타고 중국에 다시 돌아갔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앤서니 그레이의 의견은 호주 국내에서 조롱당했다. 홀트는 반공주의자였고 아내의 말에 의하면 "[[중국 요리]]도 싫어했다." [[구소련]]이 파견한 군사 고문단[* 소련군과 [[KGB]]에서 군인과 비밀경찰 요원들을 군사 고문단으로 북베트남에 파견했다.]에 섞여 들어온 [[KGB]] 내진 [[소련군]] 첩보부대원들이 북베트남으로 끌고 갔거나 다시 거기서 소련 본국으로 끌고가 [[굴라크]]에 감금해 거기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이외에도 홀트가 [[마약]]중독자로 약에 취해서 익사했다는 설,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던 호주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는데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미국 중앙 정보국|CIA]]가 사고를 가장해 암살했다는 설, 심지어 해당 지역에 예전부터 [[UFO]]가 자주 출몰하는지라 외계인이 납치 후 생체실험하고 살해했다는 등 온갖 [[음모론]]이 나돌았다. 음모론을 배격하고 현실적으로는 서핑 중 갑작스러운 [[이안류]] 등 파도의 변화로 휩쓸려가서 그대로 익사했거나 상어의 습격으로 죽었다고 보는게 가장 타당할 듯 하다. 실제로 호주 앞바다는 어디든 상어가 득실거리며 상어는 서퍼들을 물개로 착각하고 자주 공격하는데 이때 '살짝'(...) 물어 확인하는 게 인간 입장에서는 끔살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같은 몸의 이상으로 즉사한 뒤 시신조차 유실되어 못 찾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름 설득력이 있다. 비타민 결핍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34 || [[호주]] 연방 하원의원 선거 || 야라 ||<|6>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Navy; font-size: .9em" [[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FFFFFF '''통합호주당'''}}}]]}}} || 10,741 (27.3%) ||<|2> 낙선(2위) ||<|2> || || 1935 || [[빅토리아 주]] 주의회 선거 || 클리프턴 힐 || 8,531 (38.5%) || || 1935 || 호주 연방 하원의원 보궐선거 ||<|5> 포크너 || '''24,594 (59.9%)''' ||<|13> '''당선(1위)''' || '''초선''' || || 1937 ||<|13> 호주 연방 하원의원 선거 || '''33,277 (55.1%)''' || '''재선''' || || 1940 || '''38,387 (60.8%)''' || '''3선''' || || 1943 || '''41,602 (58.0%)''' || '''4선''' || || 1946 ||<|10> [include(틀:호주 자유당)] || '''39,037 (53.5%)''' || '''5선''' || || 1949 ||<|8> 히긴스 || '''26,018 (66.8%)''' || '''6선''' || || 1951 || '''24,217 (64.4%)''' || '''7선''' || || 1954 || '''22,849 (65.4%)''' || '''8선''' || || 1955 || '''25,476 (64.4%)''' || '''9선''' || || 1958 || '''24,486 (63.2%)''' || '''10선''' || || 1961 || '''22,004 (56.7%)''' || '''11선''' || || 1963 || '''22,835 (60.1%)''' || '''12선''' || || 1966 || '''23,918 (63.3%)''' || '''13선''' || == 기타 == 홀트가 죽은 이유가 무엇이었든, 홀트의 갑작스러운 실종은 집권당이었던 자유당-국민당 연정의 선거 대비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홀트를 기념하기 위한 시설로는 그의 이름이 붙은 [[멜버른]]의 [[https://www.stonnington.vic.gov.au/active/About/Centre-locations/Harold-Holt-Swim-Centre|'''수영장''']]이 있다. [[SCP 재단]] SCP-3477의 모티브라기보다는 본인. 어째서인지 총 34명의 해럴드 홀트가 각자 다른 방법으로 불사신이 되어있다. [[심슨 가족]]에서 바트가 호주인에게 장난전화를 해서 500달러나 통화료가 나와서 빡친 호주 의원이 총리에게 말하는데 그 총리가 수영장에 있는 것으로 패러디하였다. [[분류:1908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호주 총리]][[분류:실종된 인물]][[분류:뉴 사우스 웨일스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