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북한의 국보]][[분류:고구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해모양 뚫음무늬 금동장식.png|width=100%]]}}}|| || {{{#000,#fff 한국에 전시된 레플리카.}}}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550868159.jpg|width=100%]]}}}|| || {{{#000,#fff 흔히 말하는 '[[삼족오]] 문양'을 확대한 이미지.}}}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인 [[1941년]], 평안남도 중화군 진파리(현 [[평양시]] [[력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한 진파리 고분군 제7호분에서 발굴된 금동 장식이다. 매체에 따라서 '''금동 해모양구름무늬 뚫음새김''', '''해뚫음무늬 금동장식''', '''일상투조 금동장식'''(日像透彫金銅裝飾)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제작시기는 [[고구려]] 후기인 [[6세기]]로 추정되며, 중앙에 태양을 나타내는 무늬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봉황과 용 문양이 맞뚫림으로 처리되어 있다.[* '95 미술의 해 조직위원회 한국미술 명품 100선 (1995) 참조.] 무늬의 폭은 약 1~3mm로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 고구려 미술의 백미를 보여준다. == 오해 == [[삼족오]]가 고구려를 비롯한 조상들에 의해 숭상되었다는 사실과, 대중적으로 '이 무늬가 고구려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조합되어, '''"이 삼족오 무늬가 곧 고구려를 대표하는 국기(國旗) 또는 국장(國章)이 아니냐"'''는 식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무늬는 전술하다시피 무덤에서 출토된 장식품의 부속문양으로, 해당 문양이 나라 전체를 상징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구려 국기 주장안1.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구려 국기 주장안2.png|width=100%]]}}}|| ||<-2> {{{#000000,#ddd 위 문양을 차용해 '고구려 국기'라고 잘못 알려진 이미지들.}}} || 물론 고구려의 일부 벽화나 유물 등지에서 세 발 달린 까마귀로 보이는 형상이 등장함으로써 삼족오가 영물로서 숭배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으나, 이는 당대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에서도 그러했다. 세간에서는 아예 이 무늬를 원 모양으로 잘라서 고구려 군기인 붉은 색 깃발[* 고구려 벽화에서 군사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있긴 하지만 이것도 국기인지, 군기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에 갖다 붙여, '''"이게 고구려 국기다"'''라고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사례까지 있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위 문양과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문양이 고구려 유적 여기저기에서 출토되어야 하는데, 해모양 뚫음무늬의 삼족오 문양까지 똑같이 그려낸 장식이나 벽화 등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과대해석하는 것은 엄연히 [[역사 왜곡]]이다. 실제로 고구려가 '국기'를 사용했으리라는 근거는 발견할 수 없고, 이러한 고정관념 자체가 너무 현대인의 시점에서 판단하려 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 고대 국가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국기 개념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으며, 중국에서도 [[청나라]] 후기, 한국사에서는 [[조선시대]] 후기, [[일본]] 역시 [[쿠로후네 사건]] 이후에서나 근대적 국기가 만들어졌다. 살펴보면 전근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왕을 상징하는 '어기'와 군대를 상징하는 '군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지, 현대의 국기에 대응하는 상징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특정 국가에서 즐겨사용하는 문양, 색, 상징물 정도는 당연히 존재했으나 고구려의 삼족오 문양은 이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