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수서)] [include(틀:북사)] ||<-2> {{{#fecd21 '''{{{+1 수나라의 대신[br]고양문절공(高陽文節公)[br]{{{+1 許善心 | 허선심}}}}}}'''}}} || || '''[[작위|{{{#fff 작호}}}]]''' ||<(> 고양군 개국공^^(高陽郡 開國公)^^ || || '''{{{#fff 시호}}}''' ||<(> 문절(文節) || || '''{{{#fff 성}}}''' ||<(> 허(許) || || '''{{{#fff 이름}}}''' ||<(> 선심(善心) || || '''{{{#fff 자}}}''' ||<(> 무본(務本) || || '''{{{#fff 부친}}}''' ||<(> 허형(許亨) || || '''{{{#fff 출생}}}''' ||<(> 562년[* [[진서(남조역사책)|진서]]에서 허형이 570년에 사망하였다는 점과 허선심이 9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기록을 감안하여 적용한 연도이다. [[수서]]에서는 558년으로 나온다.] ~ 618년 || || '''[[본관|{{{#fff 본관}}}]]''' ||<(> 고양군(高陽郡) 북신성현(北新城縣) || || '''{{{#fff 국적}}}''' ||<(> 진(陳) → 수(隋)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진(육조)|진나라]], [[수나라]]의 인물로 자는 무본(務本).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삼국시대)|조위]]의 인물인 [[허윤]]의 후손이라고 한다. == 생애 == 허선심은 562년에 남조 진나라에서 허형과 범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본적은 고양군 북신성현이었으나, 남도하면서 집안이 항저우에 정착했고, 대대로 강남 왕조에서 관직을 맡았다. 허선심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인 범씨의 손에 길러졌다. 허선심은 총명한 인물이었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서릉은 허선심이 신동이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허선심은 관직을 신안왕 법조참군으로 시작하였고, 강총이 허선심을 수재로 선거하면서, 탁지랑중(度支郞中)으로 제수되었고 시랑(侍郞)으로 전임되었으며, 찬사학사(撰史學士)로 보임되었다. 588년에는 통직산기상시가 되어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허선심이 수나라에 머무르고 얼마 뒤인 589년에 진나라가 멸망하였다. 진나라의 멸망 소식을 들은 허선심은 통곡하였고, 이 모습을 본 [[문제(수)|수문제]] 양견은 허선심을 진정한 충신이라고 칭찬하였다. 허선심은 수나라에서 우부낭중으로 제수되었고, 문제가 재위한 동안 비서승, 황문시랑, 태복소경을 역임하였다. 604년에 [[양제(수)|양제]]가 즉위하고, 허선심을 암주(岩州) 자사로 제수하였는데, [[양량]]이 중도에 반란을 일으켜서 암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허선심은 605년에 예부시랑으로 전임되었는데, [[우문술]]이 허선심을 매우 증오하였고 그에 의해 참소를 당하였다. 이후 허선심은 급사랑으로 좌천되었고, 뒤에는 건절위, 조산대부, 통의대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618년에 우문술의 아들이 [[우문화급]]이 양제를 시해하였다. 이때 양제를 따라 강도에 피난해있던 관원들은 우문화급에게 만세를 불렀는데, 허선심은 홀로 나아가지 않았다. 우문화급은 허선심이 자신에게 축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에는 허선심을 살해하였다. 허선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범씨는 “국난을 위해 죽을 수 있다니, 나에게는 정말 좋은 아들이었구나.”라며 허선심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10여 일 뒤에 죽었다. 사후에 [[양동(수)|월왕 양동]]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허선심을 고양군 개국공으로 추봉하고, 문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기타 == [[당나라]]의 간신이었던 [[허경종]]은 허선심의 아들이었다. 허경종의 행적에 대해, 당대의 인물들은 “허선심이 죽고, 허경종이 춤을 추어 제 살길을 찾았다.”고 평가를 내렸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항저우시 출신 인물]][[분류:562년 출생]][[분류:618년 사망]][[분류:살해된 인물]]